신판 중화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포츠인 축구 또한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으로까지 진화한다. 영국의 럭비경기에서 발전했다는 게 통설인 축구가 중국의 옛 스포츠인 ‘축국(蹴鞠)’에서 비롯됐다는 게 요지다. 실제 고고미술자료에 나타난 축국 장면은 지금의 축구와 흡사하다.
축국이라는 말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중 전국시대 유세객으로 이름 높았던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두 사람의 행적을 정리한 ‘소진열전(蘇秦列傳)’이라는 곳에서 가장 먼저 보인다. 이후 중국인, 특히 권력자들이 즐기는 스포츠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축국은 한반도에도 일찌감치 상륙했다. 축국과 관련한 가장 유명한 사화(史話)는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 이야기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625년(혹은 626년) 무렵 김유신과 김춘추는 지금의 경주 어느 광장 같은 데서 축국 경기를 했다. 김유신이 초청한 형식으로 이뤄진 이 경기는 기록만 보면 두 사람만 한 것처럼 돼 있지만 편을 가른 팀 스포츠로 유추된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각기 그들 팀을 대표하는 ‘캡틴’이었다. 친선경기였지만 매우 격렬하게 진행된 듯하다.
595년생인 김유신은 당시 나이가 만 30세를 넘겼으니 그보다 9살이 적은 20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김춘추를 맞받아쳤다가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던지 ‘태클’ 혹은 ‘유니폼 잡아채기’ 전략을 구사한 듯 싶다. 김춘추의 옷이 찢어졌기 때문이다. 1천400년 전 일어난 이 일화는 김유신이 기획, 감독, 주연까지 한 고도의 ‘정치 스포츠 게임’ 인 셈이다. 김유신은 찢어진 옷을 기워 준다며 자기집으로 데려간 김춘추를 누이동생인 문희가 혼자 있던 방으로 들어가도록 꾸며 ‘역사’를 이뤘다. 이 때의 만남으로 문희가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아버지 김춘추의 뒤를 이어 일통삼한(一統三韓)을 달성한 문무왕 김법민(金法敏)이었다. 이들 부자를 김유신이 절대적으로 지원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김유신·김춘추 생각을 하면 한국대표팀이 월드컵 사상 첫 원정 16강에 진출한 축구가 이래 저래 재밌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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