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가 기울었다. 잔잔한 궁평항 파도는 은빛 비늘을 파닥이고 빈 바다엔 두고 갈 추억만 남겼다. 방파제를 걷는 연인, 매서운 해풍에 굴하지 않고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 고달픈 삶을 이끌어내는 각설이의 질긴 육자배기, 불우 이웃돕기 하는 무명가수의 통기타 앞에서 나는 비장하게 지갑을 열었다. 귀로에 미술관에 들렸다. 입구로 통하는 아르페지오네 카페엔 피셔디셔카우의 겨울 나그네가 감미롭게 흘렀다. 음악과 그림과 커피가 있는 난로 가에서 노 부부 화가와의 담소는 너무나도 따뜻했다. 느리게 살자! 동짓달 짧은 해가 어둠에 묻힌 길에 고은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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