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라도 막아라”… 사흘간 격전끝 중공군에 첫 대승

6·25 60주년 특별기획/UN참전비 순례 - 지평리지구전투전적비

제1, 2차 세계대전의 무대가 된 프랑스. 그 곳 젊은이들은 전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신생 독립국 ‘코레(Cor'ee)’는 미지의 세계였다. 프랑스 참전군은 마르세유 항을 출발한 지 36일 만인 1950년 11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해 1·4후퇴 다음 날인 1951년 1월 5일 전선에 배치됐다. 이후 ‘지평리전투’(1951년 2월 13∼15일), ‘단장의 능선 전투’(1951년 9월 13일∼10월 13일), ‘화살머리 고지 전투’(1952년 10월 6∼10일) 등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세 차례 3개 대대를 교체하며 연인원 3천421명이 참전한 프랑스군은 262명이 사망했으며 1천8명이 부상을 입었고 7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오직 자유와 평화를 위해 젊음을 바쳤다.

“단 한 사람도 내 허락 없이 물러나지 마라! 총알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막아라!”

 

전투 재연을 통해 60년 만에 몽클라르 중령의 용맹한 외침을 다시 듣게 된 노병(老兵)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날이 떠올라서다. 건장했던 청년은 전쟁의 흔적 만큼이나 굵은 주름이 패인 노인이 됐지만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는 전쟁이다.

 

지난 5월 26일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열린 6·25전쟁 발발 60주년 기념 ‘지평리 전투 상기행사’에는 지평리 전투에 참가했던 프랑스 참전용사와 가족 82명, 미국 참전용사 100명, 한국군 참전용사 141명을 비롯해 국내 프랑스인·보훈단체 등 2천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실감 넘치는 전투장면이 재연돼 주위를 숙연케 했다.

 

20기계화보병사단 장병 1천여 명과 전차 12대, 헬기 2대가 투입된 이번 전투 재연은 1951년 2월 중공군 4차 공세에 맞서 사흘간 지평리를 방어한 ‘지평리 전투’를 바탕으로 했다.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 참전 이후 패배를 거듭하던 유엔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처음 대승을 거둔 전투로, 유엔군이 재차 반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의 ‘발지전투’와 함께 대표적인 ‘사주방어’ 전투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중공군과 맞써 싸웠던 미 제2사단 23연대, 프랑스 대대의 무훈과 충성스러운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바로 ‘지평리지구전투전적비’다.

 

지평리지구전투전적비는 지평리의 중심인 지평초등학교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서 용문산을 바라보고 있다. 주차장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먼저 150㎡ 규모의 공터 좌·우측에 프랑스군과 미군 참전 충혼비가 나란히 서 있다. 2006년 2월15일 한·프랑스 수교 120주년을 맞아 설립된 비석들이다. 또 다시 계단을 오르자 기단과 탑의 높이가 각각 2m 정도 돼 보이는 전적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문에는 ‘단기 4290년 7월 15일 제5사단 세움’이라는 글자가 양각돼 있다. 휴전 직후인 1957년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전적지 고지에서 바라본 지평리 일대는 따뜻한 봄날만큼이나 평온했다. 국방부의 6·25전쟁 60주년 7대 전투 기념행사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격전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지평리는 인근의 험준한 용문산과는 달리 주변 일대는 300m 내외의 크지 않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평리 마을 중심 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후좌우로 보이는 것은 온통 작은 고지뿐이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이 당시 아군에게는 사주방어를 편성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지평리 인근 20사단은 매년 2월 15일 전적비서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6월 25일에는 지평리 청장년회가 주축이 돼 제사를 지내며 전사한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지평리전투는

미군과 프랑스군, 한국군이 병력과 화력의 열세에도 인해전술을 펼치던 중공군 5만여 명의 파상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 한국전쟁 10대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1950년 10월 중국의 개입으로 1·4 후퇴 후 한강 이남까지 밀린 유엔군은 서부지역에서 반격으로 전환해 1951년 2월10일 한강 남쪽에 진출, 서울 재탈환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한강을 건너려면 서울의 동쪽 측면을 압박해야 했다. 유엔군은 지평리에서 중공군을 흡수·격파할 계획을 세우고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이들의 총 병력은 5천600여명. 5만 여명으로 추정되는 중공군의 병력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이었다.

 

2월13일 밤, 지평리를 포위한 중공군이 새까만 개미 떼처럼 공격을 개시했다. 사흘동안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아군의 막강한 화력에도 불구, 밀물처럼 몰려드는 중공군의 공격을 감당하기엔 벅찼다. 몽클라르 중령의 프랑스 대대는 철모를 벗어 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두른채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중공군을 물리쳤다. 다음날 크롬베즈의 제5 기병연대가 2개 전차중대와 2개 포병대대로 무장, 지평리에 투입됐으며, 15일 제23연대와의 통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아군의 증원부대가 지평리에 투입되자 사기가 떨어진 중공군은 더이상 공격을 포기하고 15일 밤 슬그머니 철수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고 이후 38선 회복을 위한 큰 밑천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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