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당이 ‘장외투쟁(場外鬪爭)’에 나선 것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전후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은 직선제가 아니라 국회에서 선출했다. 그러나 6·25 전쟁직전에 구성된 2대국회는 반(反) 이승만 세력이 다수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국회에서 재차 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승만 지지 세력은 1951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찬성 18, 반대 143이란 형편없는 표차로 부결됐다.
그러자 원외자유당 등 이대통령 지지 세력이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였으며, 국회해산요구와 함께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맞서서 민주국민당 등 반 이승만 세력은 호헌구국투쟁위원회를 구성해 장외투쟁에 나섰다. 이것이 우리나라 정당의 장외투쟁의 효시이다.
제1공화국 때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연장과 이에 대한 야당의 견제가 대립하면서 시작된 우리나라 정당의 장외투쟁은 1987년에 민주화된 현행헌법이 만들어지고 수차례에 걸친 평화적 정권교체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의회정치의 본령인 대화와 타협의 논리나, 심의절차는 무시되고, 각 당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농성과 물리적인 저지, 강행처리를 의회운영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아왔고 야당의 장외투쟁은 연례행사처럼 벌어졌다.
1990년에 3당 합당, 방송관계법 변칙통과, 내각제 개헌론 등 때문에 평민당이 장외투쟁에 나섰고, 1994년엔 민주당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저지를 위해 장외투쟁에 나섰으며, 1995년엔 국민회의가 5·18관련자 처벌 특검제 도입과 중대선거구제 전환중지를 요구하며 장외투쟁에 나섰다. 1997년 정권교체 이후에는 한나라당이 주로 장외투쟁에 나섰다. 1999년 언론대책 문건 폭로에 이어진 장외투쟁, 2000년엔 국회법 날치기 통과와 총선 비용 실사 개입의혹, 한빛은행 대출부정 사건 관련 장외투쟁, 2003년에는 대통령측근비리관련 특검법안을 대통령이 거부한데 대해서, 2005년에는 사학법 강행처리에 대한 장외투쟁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우리국회의 관행화된 장외투쟁이 지조와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교문화아래서 타협과 협상은 공작과 배신이란 누명을 쓰기 쉽기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우는 정치투쟁이 일상화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8·15 해방정국에서 건국과 정부수립을 둘러싸고 우파, 좌파, 중간파가 치열한 투쟁을 벌였으며, 제헌국회에서는 토지개혁, 반민특위 문제 등 체제의 정통성 문제로 격렬하고 적대적인 의회운영을 해온 것을 지금까지 답습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특히 군사정권하에서 군인 식 행동방식이 우리 의회를 30년간 지배해왔기 때문에 여당은 일사불란한 신속처리를 하고, 야당은 결사적 저지와 장외투쟁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60년간 지속돼온 우리 정당들의 장외투쟁이 난국타개와 정국 수습에 도움이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민주화를 성취한 이후에, 장외집회라는 과거 투쟁도식이 얼마만큼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왔는지도 미지수다. 특히 올해는 연평도 포격의 경악이 진정되기도 전에 여야가 난투극을 벌이고 끝내 장외투쟁이 이어지면서 정치가 사라졌기 때문에 국민들의 마음도 불안했을 것이다.
대화와 타협, 상생의 정치는 필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국민들의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해마다 정기국회가 끝날 무렵이면 우리국회는 파행을 면치 못하고, 야당은 거리로 나서고 있다. 지금은 한 해를 마무리할 시점이다. 국민들에게 송구한 마음에서 왜 우리 국회운영의 폐습은 쉽게 극복돼지 않는지, 그 이유는 무엇이고, 언제 어떠한 계기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헌정사를 돌아보며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홍일표 국회의원(한·인천 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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