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기나긴 유배생활 중 집필·초고 구상 정서·제본 등 유배시절 제자들 공동 작업 마현으로 귀향 ‘여유당집’으로 집필 마감
올해는 공의 갑년이 돌아오는데, 육경사서지학(六經四書之學)과 경세실용지학(經世實用之學)을 끝냈으니, 천하에서 할만한 일은 모두 끝낸 셈이다. 하늘 및 사람의 성명(性命)의 근원과 생사 및 변화의 근본을 체험했으니, 다시는 저술에 마음을 쓰지 않고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었다.(사암선생연보)
정치적 당색을 초월한 교유로 당대의 사회현실 근본적으로 재검토
정치구조·경제·행정·군사 등 다양한 영역의 종합적 체제 갖춰
■ 방대한 저작, 《여유당전서》 182권 503책
정약용은 1822년 자신의 회갑을 맞이하여 저술활동을 마감하고 저작을 《여유당집》으로 정리한다. 자찬묘지명이라 널리 알려진 글에서 정약용은 자신의 저작을 총 182권 503책으로 분류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경집 88책 250권 - 시경강의詩經講義, 중용강의中庸講義, 대학강의大學講義 등
문집 30책 87권 - 시집詩集, 문집文集 등
잡찬 64책 166권 -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심서欽欽新書 등
■ 18년간의 유배생활과 《여유당전서》집필
정약용의 저작은 대부분 강진 유배시절에 집필되거나 초고가 이루어졌다. 물론 이러한 저작에 대한 구상은 유배생활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정조의 신임아래 경륜을 펼쳤던 규장각 시절 방대한 서적을 두루 섭렵하며 향후 저술활동의 중요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초계문신 시절 국왕 정조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하기 위해서 《중용강의》 등 경학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하였고, 이와함께 원목(原牧), 원정(原政,) 전론(田論) 등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개혁안과 경세학의 큰 방향과 문제의식도 가질 수 있었다.
정조사후 급격한 중앙 정국의 변동하에 기약없는 유배길에 오른 정약용은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이룰 수 없었던 자신의 개혁 사상을 방대한 저술로 남긴 것이다.
■ 집필 활동의 조력자들
5백여 권에 달하는 정약용의 저작을 완성하는데에는 유배지에서 만난 제자들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의 현손 정규영(丁奎英)이 쓴 《사암선생연보 俟菴先生年譜》에는 강진 시절의 저술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이 20년 동안 유폐되어 다산에 있으면서 열심히 연구와 편찬에 전념하여 여름 더위에도 멈추지 않았고 겨울밤에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제자들 가운데서, 경서와 사서(史書)를 부지런히 살피는 사람이 두어 명이요, 입으로 부르는 것을 받아 적어 붓 달리기를 나는 것같이 하는 사람이 서너 명이요, 항상 번갈아가며 원고를 바꾸어 정서(正書)하는 사람이 서너 명이요, 옆에서 줄을 치거나 잘못 불러준 것을 고치고 종이를 눌러 편편하게 하여 책을 장정하는 사람이 서너 명이었다. 무릇 책 한 권을 저술할 때에는 먼저 저술할 책의 자료를 수집하여 서로 비교하고 서로 참고하고 정리하여 정밀하게 따졌다.
유배시절, 정약용은 아전 제자 6명과 양반제자 18명을 양성하였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듯, 정약용이 왕성하게 저작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술에 있어서 자료조사(필사)정서 및 제본 등의 작업을 제자들에게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분화된 협력적 방식의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제자들과의 공동작업의 덕분으로 한국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 마현으로의 귀향과 저작의 총정리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때는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였다. 이후 1836년 75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이곳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만년에 정약용은 유배시절 편찬한 저술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혀 질 수 있도록 정리에 힘을 쏟았다. 평생에 걸친 자신의 학문과 저술체계를 정약용은 “육경사서(六經四書)로서 자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니, 뿌리와 가지를 갖추었다”(자찬묘지명)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육경사서의 경학과 일표이서의 경세학이 표리를 이룬다고 제시한 것이다.
또한 저작의 완성과정에서 정약용은 신작(申綽), 김매순(金邁淳), 홍석주(洪奭周), 김정희(金正喜)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과 심도있는 토론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비록 정치적인 지향을 달리했던 노론과 소론을 대표하는 학자들이었지만, 당색을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정약용 스스로의 고백처럼 그의 저술이 갑자기 몰락해 버린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속에 과격한 표현이 간간히 있으며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한정되어 있는 유배기에 만들어져 논거상의 오류가 있었기에 여러 학자들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 수정해 나갔던 것이다.
■ 주요 저작의 내용
정약용의 저작에 담긴 사상은 당대의 사회 현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서 나온 개혁론을 담고 있다. 정치구조와 행정체제, 형률제도, 경제제도를 비록하여 생산기술과 군사제도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종합적인 체제를 이루고 있다.
정약용의 경세학의 핵심은 ‘일표이서’라 불리는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심서》에 수록되어 있다. 간단하게 이들 저술의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경세유표》에서는 조선의 전 국토를 도로망으로 연결되는 생활권역으로 분할한 위에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와 정전법으로 구획된 농촌으로 구성되도록 하려는 거대한 국가개혁론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개혁론을 통해 분업(分業)의 효율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지향했던 것이다.
《목민심서》에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들이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지켜야 할 기준을 확립하고 구체적인 사무를 제시하였다. 정약용은 목민관으로서 요구되는 정신자세의 기본 강령을 ‘자신을 다스려라’, ‘공무에 봉사하라’, ‘백성을 사랑하라’라는 세가지로 규정하였다.
《흠흠신서》를 저술한 것도 재판을 담당하는 목민관으로서 백성의 생명을 소중히 하고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 역할을 돕기 위해서였다.
■ 저작을 둘러 싼 의문들
정약용의 방대한 저작의 내용을 둘러싸고 몇가지 의문이 있어왔다. 정약용의 저작 가운데 합법적 저서와 비합법적 저서가 있다던가, 세간에 널리 떠도는 바와같이 《경세유표》와 《목민심서》가 혁명적인 저술이기 때문에 전봉준과 호지명이 애독했다는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정약용을 혁명가로 주장하는 견해이며 공개되지 못한 몇 개의 저서가 이러한 사상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다.
현전하는 정약용 저작을 기록한 130여종의 필사본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이러한 유설(流說)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저작 중 유일하게 비본(秘本)으로 표기된 것은 1종으로, 이 책에는 이가환, 이기양, 권철신, 정약전 및 정약용 자신의 묘지명을 수록하고 있다. 수록된 인물들은 모두 순조초년 신유옥사에서 장살(杖殺)되었거나 유배된 사람들이다. 때문에 이 묘지명들은 원한에 맺힌 글이거나 자신들을 핍박한 당대 권력자를 비난한 글로서 당시에 공개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약용은 이것만은 ‘비본’으로 해 둔 것이다. 이외에는 여유당집을 검토하는 한 다른 ‘비본’은 없다.
■ 식민지시기 조선학운동과 《여유당전서》의 간행
정약용의 저작은 생존시에 이미 문집 간행을 위한 초고본이 존재했고, 후손들에 의해 꾸준히 교열작업이 이루어졌다. 1883년(고종 20)에는 왕명으로 《여유당집》 전체가 필사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정약용 저작에 대한 간행과 관심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1934~1938년 정약용 서거 100주기를 기념한 ‘조선학운동’에서 였다.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은 식민지 상황하에서 민족주의계 지식인들이 문화적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4년에 걸쳐 《여유당전서》(신조선사본) 154권 76책에 달하는 신활자본을 간행하였다. 다산학을 민족독립운동의 사상적 거점으로 설정하면서 이루어졌던 연구였고,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속에서 조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였다. 이후 신조선사본은 두 차례의 영인본으로 제작 보급되면서 다산학 연구에 널리 활용되었다.
최근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는 2004년부터 신조선사본을 현전하는 여러 필사본과 대조 교감하고 현대적 표점을 더한 《정본 여유당전서》를 발간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2년 다산 서거 250주년을 맞이하여 그간의 정본화 작업의 성과를 종합함과 동시에 다산의 저술에 대한 수준높은 성과물의 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조준호(실학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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