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을 중지하시고 정사를 돌보십시오. 옛날 임금은 하루 사이에도 만 가지의 일을 보살피되 깊이 생각하고 멀리 걱정하였으며, 그 좌우에는 올바른 선비를 두고서 정직한 말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부지런하여 감히 편안히 쉴 수 없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놀이에 미친 사람이나 아니면 사냥꾼과 더불어 매나 개를 풀어놓고 꿩이나 토끼를 쫓으며 산과 들을 달리면서 스스로 그칠 줄을 모르시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신라 진평왕 때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김후직이 왕에게 올린 ‘지부상소(持斧上疏)’인 ‘상진평왕서(上眞平王書)’다. 국사는 뒷전인 채 한낱 소일거리에 몰입해있는 왕의 무절제함을 지적하는 붓끝이 서릿발 같다.
지부상소는 글자 그대로 거적을 메고 도끼를 든 채 대궐에 들어 가 왕에게 드리는 상소로서 “내 말이 틀리다면 도끼로 내 머리를 쳐 달라”는 뜻이다.
조선 선조 때 일본 사신의 목을 베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라고 절규했던 조헌의 지부상소, 병자수호조약 체결을 앞두고 올린 최익현의 ‘병자지부상소’가 대표적이지만 그보다 훨씬 전 고려시대 우탁이 이를 선도했다.
우탁은 충선왕이 부친의 후궁과 통정하자 지부상소를 올려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터인데, 만고에 걸쳐 변할 수 없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라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조식(1501 ~1572)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서 수렴청정을 하는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로 칭하고 명종을 고아에 비유해 매섭게 일갈하면서 단성현감 자리에서 사직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이(1536~1584)는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선조가 도량이 넓지 못하고 공부가 부족해 문제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이념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에도 관료가 국가지도자를 이렇듯 통렬하게 비판한다는 건 옷 벗을 각오를 하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다. 하물며 봉건질서가 철저하게 뿌리내린 왕조시대에서랴. 그러나 우리나라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신료가 서슬 퍼런 정의감과 강직함으로 벼슬을 내놓고, 심지어 목숨을 내놓으면서 왕에게 직언을 올렸다. 그 수단은 대개 상소였다. 말보다 글을 택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최대한의 논리를 전개하는 이유가 컸다. 이황(1501~1570)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 나오는 “직접 구두로 진술해 올리면 본래 정신이 흐리고 구변이 무딘지라 한 가지를 아뢰면서 만 가지를 빠뜨릴 우려가 있으므로”라는 말에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무진육조소’의 요지는 이렇다.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바른 사람을 질시하고 남을 기피하여 틈만 나면 일을 저지르는 자는 단연코 미리 눌러야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현명하고 착한 사람들을 멀리하고 서로 배척하게 되면 도리어 손해를 보게 될 것 입니다. 오직 보수적이고 상리(常理)만을 지키는 신하에게만 의지하면 새로 분발하고 진작하여 잘 다스리는 데 지장이 있을 것이며, 반대로 지나치게 진취적이고 새로운 것 만을 좋아하는 자에게 일을 맡기면 잘못하다가는 기존질서가 문란해질 것 입니다”라고 했다.
신하된 도리로 바른 말 하는 게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상소는 한 선비, 신료의 사회적 위상과 목숨을 송두리째 걸어야 할 비장한 결단의 표출이다. 상소로 패가망신한 사례는 조선역사에 많다. 광해군 때 부사직 정온은 영창대군이 피살된 데 대해 “영창은 죄가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위리안치 됐다.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과 이항복은 인목대비 폐비불가론을 광해군에게 올렸다가 삭탈관직됐다. 고산 윤선도는 현종 시절 이른바 ‘예송논쟁’ 와중에 송시열을 맹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고 유배됐다. 송시열은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한 것은 잘못이라고 숙종에게 고언했다가 결국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쳤다.
현대판 상소가 없는 게 아니다. 눈치 보기에 급급한 관료들이 상소하지 않을 건 뻔하지만 언론들의 정론직필은 대통령을, 이 나라 정치를 수시로 꾸짖고 비판한다. 하지만 못 읽었는지 안 읽는 것인지 도통 우이독경(牛耳讀經),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언젠가 김영희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가 칼럼을 통해 “MB(이명박 대통령)에 실망하고 정치에 절망한다”고 질타했는데도 묵묵부답이다. 이 나라 정치, 정말 답답하고 갑갑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