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10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소재(현재 성남시 중원구, 수정구) 이주단지에서 거주자들이 높은 분양 가격 및 열악한 정주환경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면서 대규모 폭력 시위를 일으켰다.
이른바 ‘광주대단지사건’(이하 8·10사건)이다.
당시 서울시는 인구 3분의 1이 거주하던 빈민지역을 대대적으로 철거하면서 이곳에 살던 빈민들을 서울 밖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구릉지에 금을 긋고 20평 남짓한 땅을 나누어 주고 알아서 집을 짓고 살도록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서로 뜯어 먹고 사는 자립도시가 언젠가 될 것이라는 정부의 판단이 트럭에 싣고 온 빈민들을 이 황량한 구릉지에 떨어뜨리고 간 것을 정당화해 주는 유일한 근거였다.
그렇게 해서 1968년부터 1971년 3년 사이 무려 12만 명의 도시빈민들이 이곳으로 옮겨 왔다.
단지의 상황은 수용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이 사업은 수도권 위성도시 건설이란 이름으로 추진되었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탈법적인 도시계획사업이었지만 군사독재시절이었으니 가능했다.
극심한 생활상의 고통과 불편을 겪던 거주자들은 정부에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묵살되자 끝내 폭력적 시위를 일으켰다.
14만 명의 거주자 중 5만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가슴엔 시정을 요구하는 리본을 단 채 피켓과 괭이를 들고 모였다.
분노에 찬 군중들은 공공청사를 습격해 파괴하고 불을 지르다가 일부는 버스를 뺏어 타고 서울로까지 진출하고자 했다.
사건의 절박성을 느낀 정부는 주민들의 요구사항 전부를 즉각 수용하고 공식사과까지 했으며 단지를 시로 승격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이 사건은 정부와 언론에 의해 ‘폭력적 난동’으로만 일방적으로 성격이 규정돼 왔다.
당시 사건을 보도했던 조선일보는 8·10사건을 ‘정부수립 이후 최대 소요사건’으로 소개했다.
실제 이 사건은 멀게는 6·25 이후, 가까이는 60년대 도시화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목도한 도시소요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그것도 서슬이 퍼런 군사독재의 철권통치 하에서 헐벗고 힘없던 도시빈민들이 생명을 담보로 하여 자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었고, 또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신속하게 무마되었던 사건이었다.
단순한 난동이라 하기엔 사건의 규정자(規定者)들이 결코 가볍거나 사소한 것들이 아니다.
사건의 장소와 시간은 좁고 짧았지만 사건의 요인은 ‘넓은 사회구조 속에서 긴 시간을 거쳐’ 생성된 것이었고, 시위꾼들의 언어와 몸짓을 통해서는 삶의 핍박함이 ‘사회의 심층 모순’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8·10 사건을 거치면서 성남은 ‘단지’에서 ‘도시’로 태어났다. 성남이란 도시를 탄생시킨 게 바로 8·10사건인 셈이다.
정부수립 이후 ‘최대 사건’이라 하면서도 덮어야 할 도시난동으로 규정함으로써, 우리는 8·10사건의 최대치를 최소치로 축소해 바라봤고 사건의 긍정성을 사건의 부정성으로 반전시켜 인식해 왔다.
이제는 타자나 강자가 아니라 주체이자 약자의 본래 관점으로 돌아가 8.10사건의 본질을 바라보면서 시위꾼들의 거친 요구에 담긴 의미의 진정성을 올곧게 해석할 때에 와 있다.
이는 우선 사건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필요하고, 또한 사건의 긍정성을 현재와 미래의 삶으로 이어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성남은 40년 전 8·10사건을 통해 표출되었던 ‘문제’를 모양을 달리해 여전히 가지고 있다. 8·10사건의 올바른 해석은 성남이란 도시를 성남답게 규정하고 만들어가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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