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동구 만석동
만석동은 한 세기 전 인천의 ‘신도시’였다. 일제는 갯벌을 메우고 산업단지와 위락시설을 유치하면서 신천지의 꿈을 키웠다. 이로 인해 호랑이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던 괭이부리(묘도)는 깡그리 파헤쳐져 지도 속에서 사라졌다. 대신 그곳에는 ‘아카사키’라는 일제의 쇠말뚝이 박힌다. 바다로는 피란민을 받아들이고 육지로는 농촌의 노동자들을 받아들인 만석동은 이제 쇠락한 포구 하나 가슴에 부여안고 그렇게 늙어가고 있다.
매립지 살리기 위해 창녀촌 유치
시계바늘을 100년 전으로 돌려보자. 경성을 떠난 지 두 시간을 힘차게 달려 온 철마는 철길 옆으로 해변이 길게 뻗은 종착지 인천역에 다다른다. 마중 나온 갈매기 한 마리가 열차 위를 선회하며 길을 안내한다.
열차는 질주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시원한 해풍으로 씻어낸다. 오른쪽 차창으로 흰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그 너머 바다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한가롭게 떠있다. 멀리 솟아 있는 영종도와 강화도는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해 바다는 마치 호수 같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모습은 100년 전 만석동 풍경이다.
만석동의 본래 태생은 바다. 현재의 만석동 대부분은 갯벌을 메워 만든 땅이다. 바다와 접한 만석동은 1900년 초 만해도 조선인 20~30가구만 사는 아주 한적한 마을이었다. 이곳을 일본인 사업가 이나다(稻田)가 1906년 9월 만석동 앞의 갯벌을 메웠다. 이 매립으로 약 50만㎡(15만평)의 새로운 땅이 생겼다.
그는 조선인 집들을 몰아내고 이곳에 정미소와 간장공장을 유치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공장이 들어오지 않았다. 매립으로 한몫 단단히 챙기려 했던 이나다는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보게 된다. 고심 끝에 그가 내놓은 방안은 유흥업소 유치였다. 당시 선화동에 있던 창녀촌 부도유곽을 본떠 ‘묘도유곽’을 설치했다. 묘도는 만석동 앞바다에 떠있는 조그만 섬이었다. 매립지에서 묘도 가는 길에 2층짜리 객실 6,7채를 만들고 구릉지에 해수탕과 고급 음식점을 갖춘 ‘팔경원’이란 위락시설을 세우는 등 주위를 홍등가로 만들었다.
구릉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현재의 만석교회 뒷마당에 서 보았다. 주위에 비해 살짝 높지만 시야가 트여 전망이 좋은 편이다. 조선총독 이토히로부미는 인천에 오면 이곳 팔경원에 가끔 들렀다고 한다. 술과 여자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돈이 풀리고 사람들이 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이곳은 너무 외져서 이토의 발길도 지역 활성화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결국 그 땅은 중국인들의 채소밭으로 전락하거나 대부분 오랫동안 잡초 무성한 황무지로 방치되었다.
만석동 매립지에 본격적으로 공장이 들어선 것은 동양방적(현 동일방직)이 문을 열면서부터다. 일본인들이 ‘동양 최대’라고 자랑한 이 공장은 1934년 10월 1일 종업원 3천명에 직조기 1천292대로 조업을 시작했다. 하루 품삯이 쌀 2되 정도로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조선인들은 동양방적에 들어가길 원했다. 유니폼 입은 종업원들은 스스로 ‘동대(東大)’에 다닌다고 할 정도로 큰 자부심을 지녔다.
이 공장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한 획을 긋는 현장이 된다. 유신말기인 1978년 여성노조원들은 이른바 ‘똥물테러’를 당한다. 이 똥물은 부메랑이 되어 유신정권이 뒤집어쓰게 된다.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이 공장은 이후 섬유업 퇴조에 따른 생산시설 이전 등으로 만석동 시대를 서서히 접고 있다.
잠수함 만들던 동네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를 빼놓고는 만석동을 얘기할 순 없다. 이 회사는 1937년 6월 광산용 기계 생산업체로 설립되었다. 공장 터를 조성하면서 ‘괭이부리섬’으로 불린 묘도(猫島)를 깡그리 뭉갠 것으로 보인다. 그 위치는 현재의 삼미사 혹은 옛 한국유리공장 앞 도로 부근으로 추측된다. 당시에는 육지의 끝 지점이다. 바다의 길목 묘도에는 조선의 포대가 있었다. 포대는 강화와 한강으로 향하는 이양선(異樣船)을 향했다. 분도, 사도, 원도(낙섬), 아암도, 청라도, 율도, 소월미도…. 묘도와 함께 지도에서 사라진 섬들이다. 이 섬들이 살아있다면 인천은 아름다운 다도해(多島海)였을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인천을 대륙병참기지로 삼는다. 1943년 4월 말 조선기계제작소는 일본육군조병창으로부터 잠수함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잠수함을 진수시키기 위해 도크를 신축하고 1천300여 명의 인력을 확충하고 그들을 위한 숙사(宿舍) 112동을 새로 건축한다. 이때에 세워진 집들이 현재의 ‘아카사키촌’의 근간이 된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화장실도 없는 쪽방으로 집을 지었다. 골목은 딱 어른 어깨 넓이다. 60년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근로자들이 묵었던 왜색풍의 집들이 힘겨운 채 곳곳에 남아 있다.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여전히 ‘공동변소’를 사용한다.
잠수함 1호기는 명령받은 지 1년 만에 제작돼 진수되었다. 해방될 때까지 총 4척의 잠수함이 만석도크를 통해 태평양으로 나갔다. 광복을 맞아 진수되지 못한 두어 척의 잠수함들은 60년대 초반까지 도크에서 녹슨 고철이 돼 나뒹굴었다. 그래서 한동안 사람들은 만석동을 ‘잠수함 만들던 동네’라고도 불렀다.
현재 아카사키촌에는 294동 판잣집에 548명이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군수공장 기술자들이 모여 살던 이 동네는 해방 후 6·25 전쟁 중에 주로 배를 타고 황해도에서 건너 온 피란민들이 정착했다. 이어 6,70년대 산업화 시기에는 호남과 충청지역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의 터전이 되었다.
“우리 부부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을 거요. 옛날 판유리공장 뒤편에 나가면 바지락이 지천이었는데 그거 잡으며 살았지. 그거 팔아도 충분히 먹고 살았으니까. 나중에 인천시 도움을 받아 5톤짜리 조그만 뗏마(배) 40척을 만들어서 주민들과 같이 낚시배 부리면서 살았어요.”
이용준(84) 양순옥(81) 노부부는 아카사키촌의 터줏대감이다. 난리통에 황해도 옹진군에서 피난 나와 고향으로의 귀환을 꿈꾸며 이곳에 지금까지 살고 있다.
만석동이 품은 부두와 섬
만석동이 바다를 완전히 잃은 게 아니다. 여전히 부두와 섬을 품고 있다. 질펀한 부두의 옛 정취는 다 사라졌지만 이곳을 통해 사람들은 바다로 나간다. 강화 동검도와 마주하고 있는 세어도를 가려면 이곳에서 하루에 한 번 왕복하는 행정선을 타야 한다. 이제 이곳은 낚시배들의 출항지로 변모했다.
만석부두에 서면 마치 봉분처럼 봉긋 솟은 섬이 하나 보인다. 멀리뛰기라도 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작약도다. 작약도의 행정구역은 만석동이다. 이 섬은 이번에 ‘만석동 작약로’라는 새주소를 얻었다. 일제가 매립하지 않고 섬으로 그대로 둔 게 고마울 따름이다.
공장지대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갯벌 위에 레일이 깔려 있는 등 다소 낯선 바다가 나온다. 후미진 그 바닷가에는 우리가 도시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선박을 만드는 중소 규모의 조선소가 있고 그 옆으로는 고장난 배들을 수리하는 일종의 ‘선박병원’이 있다. 모퉁이를 돌면 선박을 해체하는 도크도 있다. 수만리 바다를 항해한 여객선, 화물선 등이 그 생명을 다하고 장기가 적출되는 현장이다. 이렇듯 만석동 뒷바다에는 요람부터 무덤까지 선박의 일생이 있다.
글 _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사진 _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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