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오르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정의로움’을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어 올 여름, 또 다른 작은 팸플릿 책자,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눈길을 끌며, 그간 애써 지우며 살았던 ‘분노’의 DNA를 다시 꺼내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신자유주의의 아지트인 미국, 그 곳에서 공동체주의 학맥을 대표하는 한 논객의 ‘정의’에 우리는 왜 주목했는가? 자유와 관용의 톨레랑스(Tolerance)의 본고장 프랑스, 그 곳에서 삶의 황혼을 훌쩍 넘은 아흔 셋 백발 레지스탕스의 ‘분노’에 우리는 왜 귀 기울였는가? 그들은 말한다. 오늘 우리 모습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 홀로 살아남은 단절된 개인이 아니라, 오늘이 있기까지의 서사적 맥락과 ‘지금, 여기’의 관계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공동체란 단절된 개인의 단순 집합체이거나, 승자독식의 경연장이 될 수 없고, 거기서 정의와 분노는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들고 지켜내는 원동력이 된다. 아마도 우리네 공동체에 ‘정의로움’이 넘쳐난다면, ‘분노’의 함성이 메아리친다면, 그들이 그토록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진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일상의 각박함과 약삭빠름의 틈새를 허우적대는 범부들에게 매순간 ‘정의’를 떠올리며 살기를 기대하기는 버거운 일이다. 정의는 커녕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그때그때 불의에 맞서 ‘분노’하며 살기란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정의를 찾고, 분노를 외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거나, 불편하고 거추장스런 장식물이 되어 차라리 정의롭지 못할 바엔 분노를 잠재우며 사는 것이 속편한 처세술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정의와 분노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우리의 삶이 한 순간이라도 공동체를 벗어나 영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뭐 하나 남부러울 것 없거나, 개천에서 용 나듯 단기필마로 입신양명하여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해도,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고서는 입고, 먹고, 잠자는 어느 것 하나 온전한 모양새를 갖추긴 불가능한 일이다. 나만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 그 것이 곧 공동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먼 곳에서 날아온 정의와 분노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네 공동체 어딘가에도 그에 공명하는 울림이 있는 듯하다.
반면 우리 주변엔 분노 없는 ‘눈먼 정의’, 정의롭지 못한 ‘귀머거리 분노’를 외치며 정의와 분노의 화신인 양 비범한 체하는 인물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들의 정의와 분노란 공동체의 공유 가치를 지키는 보루로써가 아니라 패거리 집단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뿐임을 본다. 이들에게 공동체란 한낱 먹이사슬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바로 공동체의 적이다. 공동체란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 조건이기도 하지만, 만들고 지켜내는 사회적 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들고 지켜내기 위해선 정의롭게 분노하는 행동하는 양심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동체의 적들에 맞서 눈먼 정의와 귀머거리 분노를 가려낼 순 있어야 한다. 선량들이 외치는 구호와 격문의 계절을 보내며, 우리의 정의, 우리의 분노는 어떠한지 되짚어본다.
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