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이나 신권 등 절대적 권력이 존재할 경우 도시는 역시 그 위상에 걸맞게 폐쇄적이며 배타적으로 구성된다. 신전이나 왕궁을 거대하고 화려하게 짓는 것도 모자라 이중 성벽인 시타델로 철저하게 중무장하고 왕의 길이나 신전 행렬을 위한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도로까지 가세하여 권력을 칭송한다. 이른바 닫힌 도시 혹은 이분법적(二分法的) 도시 구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반도를 중심으로 생겨난 도시국가(polis) 가운데 하나인 아테네(Athene)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평야가 거의 없고 워낙에 산악지형도 많았던 지리적 이유 때문에 이 나라들은 다른 고대국가와 같은 통일된 왕국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다른 지역과는 격리된 채 독립적으로 그들만의 문화와 정치를 만들어 갔다. 이들의 사회적 요구는 그대로 도시구조에 반영되었다. 유사시 주민의 최후의 보루이자 신을 모시는 공간, 즉 아크로폴리스(acropolis)와 일상적인 생활공간 사이에 시민들이 모여 정치나 사회, 혹은 체육 활동을 하기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버린다. 시민들에게 열려있는 공공시설들이 도시구조 내에 새롭게 모습을 보이는 순간이자 도시의 삼분법(三分法)이 형성되는 장면이다.
아고라로 통칭되는 공공시설군에는 다양하고 특징적인 시설들이 자리하고 있다. 신을 위한 의식을 준비하는 장소이자 장로들의 거주지(prytaneion), 정치적 토의를 하기 위한 공간인 민회(agora), 민회를 대표하는 시민이나 귀족들의 모임인 평의회(boule) 등이 대표적인 공공시설이었으며 이밖에 레슬링 등 체육 활동을 위한 경기장(palaestra)과 후일 공연 등을 위한 극장 등이 나머지 공간을 채워나갔다. 이른바 공공시설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이런 시설들은 날씨 좋은 지중해 연안의 시민들의 발걸음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열린 공간이었다.
열린 공간,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스토아(stoa)와 엑세드라(exedra) 같은 건축 공간 또한 열려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랑(柱廊)과 열주(列柱)로 이루어진 스토아는 주로 주랑 내를 거닐면서 담소도 나누고 쇼핑도 하던 일종의 움직임이 있는 동적(動的) 열린 공간이었다. 반면에, 대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같은 주요 도시의 성역에 마련된 엑세드라는 학자와 시인들의 토론 장소나 휴식 및 명상을 위한 장소로 쓰였다. 이른바 시민들이 머무는 정적(靜的)인 열린 공간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생각할 때 정치나 철학 이외에도 자유로운 도시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공공 공간으로 인한 열린 도시의 모습 때문이며, 아고라 이곳저곳에 삼삼오오 짝지어 담소하는 아테네 시민들의 모습을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열린 도시 공공시설과 건축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위풍당당한 관청 같은 건물 앞에 널찍한 공간 하나 만들어 놓고 시민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이라 굳이 생색을 내지 않아도, 공간 자체가 열려있으면 혹은 그 공간에서 무언가 소통할 이야기 거리가 있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길 일이다.
도시에서의 열린 공간은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자연스러워야 한다.
김영훈 대진대 교수·건축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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