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옛말로는 잔질자(殘疾者), 독질자(篤疾者), 폐질자(廢疾者)로 불렀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이런 용어들은 <고려사> 에서부터 등장한다. 과거에도 괴이한 유형의 장애가 있었으나 위민(爲民) 복지정책으로 활로를 찾았다. 일단, 장애인에게도 직업과 자립을 권면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최한기는 <인정> 에서 “어떤 장애인이라도 배우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학파의 선구자 홍대용은 <담헌서> 에서 “소경은 점치는 데로, 궁형 당한 자는 문 지키는 데로, 벙어리와 귀머거리, 앉은뱅이까지 모두 일자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나이가 너무 들었거나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은 국가가 직접 진휼했다. 담헌서>
<고려사> 에 공민왕이 신하들에게 “독질, 폐질이 있는 자에게는 소재지 관사에서 마땅히 구휼할 것이요, 궁핍하여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도 소재하고 있는 관사에서 힘써 진휼하라”고 명한 기록이 나온다. 중앙 뿐 아니라 지방 관아에서도 장애인을 돌볼 것을 국가가 명했다. 고려사>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는 세종이 장애인 복지정책에 가장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세종실록> 에 “(장애인들이) 처소를 잃지말게 할 것”이라는 세종의 즉위년 당부가 기록돼 있다. 즉위 3년째 되는 1420년 수재와 한재가 잇따르자 “잔질인을 우선적으로 구제해주되, 장차 조관(朝官)을 보내 순행하여 물어볼 것이니, 만약에 여염 가운데 한 명의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 중죄로 처단할 것”이라는 엄명을 내렸을 정도다. 세종실록>
홀로 사는 나이든 장애인에게는 오늘날의 ‘장애인 도우미’를 국가가 제공했다. 또 장애인과 그 부양자에게는 부역이나 잡역 등을 면제했다.
이런 기록은 <고려사> 에도 등장한다. 25대 충렬왕은 “나이 80세 이상의 독질·폐질자는 그 소망함에 따라 가족 중 한사람에게 부역을 면제하여 호양하도록 허락하고, 친척 가운데 호양할 사람이 없으면 국가에서 식량을 지급하고 관원을 보내 제조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다. 옛기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애인은 시각장애인이다. 국가는 이들을 자립이 가능한 장애인이라고 여겨 직업을 갖고 살아가도록 유도했다. 시각장애인들은 점복과 독경, 악사 등을 직업으로 삼게 했다. 고려사>
<세종실록> 에 “명과학(운명·길흉·화복을 판단하는 학문)을 하는 장님 중 젊고 영리한 자로 10인을 골라서 서운관에 소속시키고, 훈도 네댓사람을 두어 사흘마다 한번씩 그 업을 익히게 하소서”라고 임금에게 아뢴 기록이 나온다. 물론 세종은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조선시대엔 시각장애인 악공을 위해 장악원에 관현맹인(管絃盲人)을, 성기능 장애자를 위해 환관제도를 두고서 정기적으로 품계와 녹봉을 올려 주었다.
고위 관직에 오른 장애인들도 많다. 이육의 <청파극담> 에 나온 허조는 척추장애인으로 조선 개국 후 네 명의 왕을 모시며 좌의정까지 지낸 청백리다. <중종실록> 에는 간질장애를 갖고 있던 권균이 사직을 청하고, <숙종실록> 엔 다리가 하나 뿐인 정승 윤지완이 임금에게 면직을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숙종실록> 중종실록> 청파극담>
시각장애인으로서 3등공신에 올랐던 이영선, 기형아로 태어나 생육신이 된 권절, 정신질환을 이겨내고 대사헌에 오른 공서린,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청각장애인 이덕수 등은 ‘장애인 관료’로 회자된다.
조선 중기 유몽인의 설화집 <어우야담> 에 다리 하나가 짧은 지체장애인을 가리킬 때 마땅히 “다리 하나가 길다”고 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도 <사소절> 에서 “아이들이 장애인을 대할 때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썼다. 우리 땅에서 장애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근·현대의 비장애인들이다. 장애의 유무보다도 그 사람 자체의 능력과 노력을 더욱 중시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자연스럽게 살았던 역사 속의 장애인 복지 제도와 참뜻을 본받아야 한다. 사소절> 어우야담>
임병호 논설위원
인정>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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