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있어서 ‘롤모델’의 중요성 밀레 삶의 태도까지 배운 고흐
스티브 잡스에게 가수 겸 작곡가인 밥 딜런은 영원한 우상이었다고 합니다. 잡스는 딜런의 노래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딜런에게 삶의 태도까지 배웁니다. 그가 보기에 딜런의 위대성은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부단히 진화해간 데 있었습니다. 잡스도 그랬습니다. 애플에서 쫓겨난 후 좌절하기보다 넥스트 컴퓨터를 거쳐 픽사의 애니메이션으로 진화하며 승승장구한 끝에 애플로 복귀하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장 프랑수아 밀레를 떠올렸습니다. 살면서 어떤 ‘롤모델’을 갖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흰 눈밭을 걸을 때도, 앞에 전봇대 같은 목표물을 정해두면 발자국이 바르게 나듯이 든든한 롤모델이 있으면 삶은 한결 반듯해집니다. 인생의 좌표설정에서 롤모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고흐에게 밀레는 평생의 우상이자 롤모델이었습니다. 그는 농민화가 밀레를 스승삼아 그림을 그렸고, 마침내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개척하여 밀레보다 더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밥 딜런을 만났을 때 가장 떨렸다고 했지만 고흐와 밀레는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고흐는 밀레를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스승을 닮기 위해, 스승의 그림을 부지런히 베낍니다. 그렇게 베낀 그림이 수십 점이 됩니다. 습작기를 지나 어엿한 화가가 된 뒤에도, 그리고 자살하기 전까지도 밀레의 그림을 모사(模寫)했습니다.
어느 고흐 전문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베끼는 과정이 곧 재창조의 과정이었다고 말입니다. 사실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원화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화를 모사한 흑백의 목판화나 사진을 보고 따라 그렸습니다. 흑백의 그림을 모사하고, 채색을 하면서 화면 구성법과 색채를 익혔습니다. 고흐 특유의 격렬한 필치와 눈부신 색채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무르익었습니다.
하지만 고흐의 위대성을 이런 베끼기를 통해 자기 스타일을 개발한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잡스가 밥 딜런에게 배운 진화를 실천했듯이 고흐도 밀레가 보여준 예술가로서의 삶까지 실천합니다.
밀레는 평생 노동의 신념을 실천하며, 농민의 생활상을 그려낸 걸출한 농민화가입니다. 그는 농촌마을 바르비종에서 가난한 농민처럼 살면서 농촌생활에 주목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밀레는 농부들의 음식, 옷, 숙소에 만족해하며, 실제로 그렇게 살았어. 그는 정말이지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어. 다른 화가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을 보인 것이지.”(1885년 4월 13일)
고흐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한 기법 수련을 넘어 자연과 인간, 노동자의 현실을 이해하고 사랑한 밀레의 삶까지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밀레처럼 살려고 탄광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림을 따라 그리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삶의 태도까지 따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흐는 밀레의 삶까지 실천하다가 위대한 화가로 거듭났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밥 딜런을 통해 용기를 얻고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듯이, 그리고 후배들의 롤모델이 되었듯이, 고흐 역시 후배 화가들의 우상으로 미술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정민영 출판사 아트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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