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2005년. 고교 2학년 A양이 자살했다. 폭행과 협박이 무섭다는 유서를 남겼다. 조사했더니 가해학생 8명이 나왔다. 오랜 기간 이어진 폭언 폭행 성추행이 있었다. 한참이 흘렀고 법원이 형을 선고했다.
집행유예. 석방됐다. 초범이고 청소년인 점이 참작됐다고 한다. 분함에 화병을 얻은 A양의 아버지도 2010년 숨졌다. 대개가 이렇게 끝난다. ‘죽은 놈만 불쌍하다’는 속된 말 이외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또 자살했다. 이번엔 생때같던 중학생이다. 목에 줄을 매단 채 끌려다니고, 물속에 처박혀 고문당하고, 찾아온 아이들에게 내 집에서 매 맞고…. 인간 이하의 학대를 홀로 견디다 허공에 몸을 던졌다.
잡고 보니 가해자들은 같은 학교 친구-이런 표현조차 적절치 않지만-였다. 아이가 죽은 뒤에도 자기들은 문자로 ‘ㅋㅋ’댔다고 한다.
유혈이 낭자한 참혹한 살해 현장에 가면 누구나 사형 찬성론자가 된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형수 앞에 서면 누구나 사형 반대론자가 된다. 죄와 벌에 대한 균형은 그렇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의 여론은 분노다. 소년범 처벌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
10살 밑에 아이들은 어떠한 잘못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범법 소년이다. 10살부터 14살까지는 형사처벌은 안 되고 보호처분만 가능하다. 촉법소년이다. 14살부터 17살까지는 형사처벌이 가능하지만 성인에 비해 제한이 많다. 그동안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많은 가해학생.
그 아이들이 멀쩡히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도 이런 규정 때문이다. 그래서 이 걸 바꾸자는 거다.
형벌의 가장 큰 목적은 일반예방기능이다. 일벌백계로 또 다른 범죄를 막자는 거다. 폭력학생에 대한 형벌의 기능도 다를 바 없다. 친구를 물고문 하면 큰 죄라는 걸 일벌백계해야 한다.
소년범 처벌규정 강화해야
친구의 목에 끈을 묶어 끌고 다니면 큰 벌을 받는다는 걸 알게 해야 한다.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가면 참혹한 형벌이 기다린다는 걸 일러줘야 한다. 사회봉사 몇 시간에 반성문 몇 장 쓰는 것으론 안 된다. 14세 미만 소년범에 대해서도 형사처벌의 여지는 터 놔야 한다.
경중을 가리지 않는 보호관찰과 사회봉사명령도 남발하면 안 된다. 법 개정이 필요하면 손질해야 하고, 형량 조정이 필요하면 협의해야 한다.
혹자는 인성교육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상황극을 통해 우정의 참뜻을 알리는게 해결책이라는 조언도 들린다. 결국 소년범 처벌 강화는 너무 성급하다는 얘기 같은데…. 지금 무슨 말들을 하고 있나. 아이들을 감옥에 넣자는 참혹한 주장이 왜 나왔는지를 몰라서 하는 얘기인가.
청소년 폭력예방재단이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학생 3천560명에게 물었다. 22.7%가 1년 이내에 폭력피해를 겪었다고 답했다. 1만 명이면 2천 명, 10만 명이면 2만 명이다.
그중에 30.9%는 자살까지 생각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57.5%가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왜 그랬겠나. 신고할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다. 신고해봤댔자 돌아올 건 보복밖에 없다고 봐서다.
자살한 대구 중학생이 어땠나. 보다 못한 친구가 교무실로 달려가자 ‘나를 죽이려고 이러느냐’며 눈물로 막아섰다는 거 아닌가.
학교는 아무 것도 보호 못해
학교는 신뢰를 잃었다. 소년범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분노한 여론이 지금 그렇게 요구하고 있다. 학교는 못 믿겠으니 검찰이 나서라고 하고, 교사의 처벌엔 기대할 게 없으니 판사의 형벌을 높이라고 하고 있다. ‘나 교육자요, 나 교육감이요’해 온 사람들. 지금은 훈수 두려고 기웃거릴 때가 아니라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굴 때다.
체벌(體罰)이 아무리 가혹해도 형벌(刑罰)보다 낫다. 우리 교육이 언제부턴가 그 끈을 놔 버렸다. 그리고 아이들이 몸을 던지고, 아이들이 감옥에 가는 이 순간까지도 누구하나 나서 ‘체벌도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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