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사법부에 대한 국민 불신, 심각하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안다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허상인지를 요즘 나는 여실히 체험하고 있다. 그간 나는 판·검사라면 당연히 투철한 소신과 남다른 공인의식을 가진 계층으로 알았고, 사법부하면 으레 혼탁한 사회를 걸러주는 중류지주(中流砥柱)와 같은 마지막 정의의 보루라고 등식처럼 믿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소박한 민초들의 나이브한 꿈이자 소망사항이지 현실은 한참 멀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의 현장경험을 통해서 온몸으로 체득했다.

 

불완전한 인간이 모인 사회집단이 말처럼 논리처럼 이상적일 수가 없다. 법조계 또한 예외가 아닐 게다. 구성원 개중에는 함량미달도 있고 양심불량자도 있기 마련일 게다. 그래서 최근에 꼬리를 무는 법조계의 물의들도 실은 이 같은 시각의 연장에서 나는 이해하고 치부해왔다.

사법부에 대한 무너진 신뢰

 

하지만 근자에 직접 송사를 겪다 보니, 그 동안 뇌리에 각인됐던 사법부의 인상은 나만의 나르시스적인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불행하게도 사법부가 정의의 보루가 아닐 수도 있다는 문항에 나는 주저없이 방점을 찍게 되었고, 속칭 ‘결론을 예단한 기술재판’이라는 말이 공연히 유행되는 사회현상이 아니라는 인과율(因果律)도 알아채게 되었다.

 

더욱 우리를 암담하게 하는 것은, 저간의 크고 작은 사법계의 신뢰붕괴 문제는 몇몇 구성원의 개인적 일탈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사법부 특유의 체질과 조직문화에 그 뿌리가 있음을 간파한 사실이다.

 

민망한 일이지만 필자가 최근에 ‘주위토지 통행권’ 소송의 피고로 겪고 있는 송사의 예를 보자. 정의롭고 냉철한 지성의 잣대라면 쌍방간의 자료를 한 번만 정독해 봐도, 사건의 본질이 위증과 허위진술과 허위도면 등으로 범벅이 된 민관유착의 전형적 협잡(挾雜)행각의 일환인지의 여부를 단번에 분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간단한 민사가 가처분을 거쳐 1, 2심까지 거치는 데만 꼬박 귀빠지는 3년이 걸렸다. 3년 송사에 집안 망한다듯이 그간 당사자와 가족이 겪은 울분은 가히 고문수준이었다. 법대로라면 1년 안에 1심과 2심의 선고까지 끝내야 한다.

 

하지만 항소심만 15개월을 끌다가 마지못한 결론을 냈다. 더욱 납득불능인 점은 항소심 종국판결일을 잡아 놓고도 이유도 없이 계속 선고를 미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뢰 회복 근원적 대안 고민해야

 

‘판결은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2주 이내에 선고해야 하고 특별한 경우 4주를 넘겨서는 안 된다’고 아예 소송법에 명시돼 있다. 그럼에도 어느 지방법원 항소부는 지난해 9월 8일을 선고일로 공지한 이래 장장 7개월에 걸쳐서, “다음 달”, “다음 달”하며 8번째로 선고를 미뤄오다가 어렵사리 지난 달 중순에서야 판결을 내렸다.

 

아마도 한국 사법사상 유례없는 진기한 판례임에 틀림없을 게다. 모름지기 ‘판사는 곧 초법적인 위치에 있는 공인’이라는 명제라도 있는 모양새다.

 

바로 이 같은 단면이 국민이 밑으로부터 체감하는 대한민국 사법부 오늘의 실상이다.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부러진 화살’을 계기로 사법부 신뢰문제에 관한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차제에 사법 당국은 ‘사법부에 대한 도전’이니 어떠니 하는, 어데서 많이 듣던 메아리 없는 대척적 미봉책에만 매몰되지 말고 근원적인 대안을 고민할 때다. 결국 정의에 목말라하는 국민이 믿고 기댈 곳은 그래도 사법부가 아니겠는가.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