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읽어주는남자] 강요배 ‘동백은 지다’

제주는 지금 동백꽃 지는 계절이다. 동백은 고개를 꺾어 떨어진다. ‘뚝’하고 꽃 진다. 사철 푸른 동백나무 밑으로 붉은 꽃이 쌓인다. 쌓인 그 꽃이 썩어 다시 붉게 살아 오를 때 새봄이 온다. 북쪽의 찬바람조차도 동백꽃 피는 것을 막지 못한다.

 

4월3일이면 어김없이 제주의 ‘4·3항쟁’이 떠오른다. 1954년 9월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7년 7개월의 싸움이 끝났다. 그 기간 동안 3만여 명의 주민이 죽고,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다. 금족 지역은 개방되었으나 섬은 2003년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 ‘원죄사슬’을 지고 살았으니.

 

강요배는 4·3항쟁의 역사를 그림으로 새겼다. 책으로 묶은 ‘동백꽃 지다’는 제주 민중항쟁사를 알기 쉬운 그림책 작법으로 세밀하게 묘사했다. 역사 속 사건을 시대와 현실, 민중으로 구분한 뒤 씨줄 날줄로 입체화한 그의 그림들은 민중역사화의 새로운 전범이다.

 

그 책에 실려 있는 ‘동백은 지다’는 대표작이다. 캔버스 전면을 검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동백나무 숲의 그림자이기도 하고, 아직 북쪽으로 물러나지 않은 한파의 그늘이기도 할 것이다. 좌측의 흰 여백이 빛이 아니라 눈(雪)으로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늘을 뚫고 푸른 정맥들처럼 솟아난 줄기들과 잎들 사이로 붉은 꽃 몇 송이가 보인다. 그 중 거꾸로 뒤집힌 채 대지를 향해 떨어지는 동백꽃 한 송이. 강요배는 선연한 이 꽃 한 송이에 4·3의 넋을 응결시켰다. 질척한 어둠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지는 꽃이 세계의 고요를 뒤흔들고 있다.

 

새봄이 왔다. 남녘에서는 동백이 다시 피고 지고, 동박새 무리들이 꽃무리처럼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사과문 발표 이후로 10년이 지났건만 제주의 봄은 아직인듯 싶다. 강정마을 구럼비는 부서지고 4·3평화기념관의 만화가 김대중의 벽화는 아직 돌아오고 있지 않으니.

 

김종길 미술평론가·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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