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대 벽두 사천성 아미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양자강을 따라 상해의 황포강까지 종주를 한 적이 있다.
중경에서 배를 타고 장강삼협(長江三峽)을 지나다보면 장강(양자강)으로 흘러드는 냇물인 향계(香溪)를 만나게 된다. 바로 이곳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명구가 유래하게 된 주인공 왕소군(王昭君)의 고향마을이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 때의 궁녀였다. 당시 한나라에서는 세력이 강성했던 북방의 흉노족에게 여인을 종종 공녀로 보내곤 했다.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치부되는 왕소군은 우여곡절 끝에 흉노의 선우 묵돌의 애첩이 되기 위해 북방으로 끌려갔다. 아릿다운 여인이 하루아침에 황사 날리고 을씨년스런 호지(胡地)로 이송되니, 본인의 고뇌도 고뇌려니와 당연히 여러 시인묵객들 또한 그녀의 비극적 시련을 두고 가슴아파하지 않을 리 없었다. 바로 그녀를 소재로한 소군원(昭君怨)이라는 명시도 그래서 탄생했고, 그 중의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이라는 싯귀도 그렇게해서 후세에 널리 회자되게 되었다.
서원 서실에는 사군자반의 매화 그림이 화사한 춘색을 더해주고, 창 밖에는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틔우고 있다. 월력(月曆)도 4월로 접어들었으니 절서는 분명 춘삼월 호시절이다. 하지만 나이 탓인지 체질 탓인지 내게는 아직도 음산한 한기가 옷깃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겨울의 끝자락이 하도 요상해서 그런지 어느 노래가사처럼 ‘꽃 피는 봄 사월’이 되었건만 냉기에 움츠러든 내겐 아직도 춘래불사춘이다.
봄에 어울리지 않는 요즘 풍경들
울 안에 산수유를 심고 나서 안 일이지만 봄의 전령은 분명 개나리보다 먼저 피는 산수유 꽃이다. 이 사실을 몰랐던 이전에는 도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개나리꽃을 화신의 메신저로 여겨왔다. 물론 개나리꽃이 없었던 내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의 봄꽃은 으레 온 산에 만발한 진달래꽃이었다. 하지만 내 삶의 공간이 도시로 이동되고부터 내 마음의 봄꽃은 단연 샛노란 물감의 개나리꽃들이었다.
젊은 날 서울의 어느 한적한 골목을 지나면서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큰 저택의 담장 너머로 새봄의 청순한 모습을 드러내던 꽃도 개나리였으며, 4.19시절 불의에 항거하며 젊은 함성이 노도처럼 거리를 누빌 때, 그들이 절규하며 흔들어대던 피 묻은 옷가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봄날의 비통을 증언하던 꽃도 다름아닌 그해 사월의 노란 개나리꽃들이었다.
선거, 진정 국민 위하는 일꾼 뽑자
개나리는 신이화, 영춘화 등으로도 불리며 한자로 연교(連翹)라고도 한다. 특히 북한 일부지역에서는 식용으로도 쓰이는 참나리에 비해 실속없는 나리라는 뜻에서 개나리라고도 한단다.
때마침 ‘나리’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다. 거리에도 상가에도 신문에도 텔레비전에도 온통 황·적·청 삼원색의 잘난 ‘나리’꽃들이 군락을 이루며 만발하고 있다.
민초들의 약이 되고 희망이 되고, 일꾼이 되고 애국자가 되겠다며 갖은 애교와 감언으로 자신들이 가장 아름답노라며 앞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하지만 한 때를 노리는 분칠한 조화(造花)들을 숱하게 겪어 본 민심들은 이내 저들 요란한 보호색 속의 속셈들을 본능적으로 꿰뚫는지라 좀처럼 믿음이 가지 않는다.
합리와 이성은 뒷전인 채 죽기살기의 원한 맺힌 감정으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저들 거리의 들꽃들 중에 진정한 ‘참 나리’꽃이 얼마나 될 것인가를 묵언의 민심들은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발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이번 ‘꽃시장’에서는 역겨운 ‘개 나리’꽃보다 향기로운 ‘참 나리’꽃이 민의의 전당으로 많이 팔려가야 할텐데 적잖이 걱정이다.
이래저래 금년 화시절은 음산한 날씨 탓만이 아니라 내 정서의 텃밭까지 춘래불사춘이다.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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