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 임동식 ‘엿장수 보이던 풍경’

단비가 내렸다. 늦깎이 봄꽃들이 향연을 만끽하는 동안 장대비가 쏟아졌다. 세찬 바람에 꽃잎이 흩날렸다. 벚꽃이 눈처럼 쌓였고 목련이 그 위를 뒹굴었다.

 

꽃 진 자리에 새잎 돋은 개나리가 무성했고 진달래는 꼭꼭 숨어버렸다. 봄비가 내려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 절기에 딱 맞게 비가 내렸으니 꽃의 향연 따위는 사치일 뿐, 올해는 분명코 풍년이 들 터이다. 청명(淸明)이 지났고 이제 곧 입하(立夏)다. 농촌은 못자리를 마련하고 볍씨를 담가 싹을 틔운 뒤 모내기를 준비하겠지.

 

자연미술가 임동식의 ‘엿장수 보이던 풍경’은 옛 추억의 한 장면이다. 봄비가 내리면 온 들녘이 푸릇푸릇했다. 시냇가는 묵은 옷을 빨던 아낙들로 붐볐고, 당산나무 아래는 엿장수 가위소리가 컸다. 아이들은 쇠붙이를 들고 나와 엿과 바꿨다. 아지랑이가 품은 햇살이 온 땅과 산과 나무에 이슬처럼 맺혀서 은은했다.

 

그의 그림들은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한 작품 한 작품씩 시간의 결이 쌓이고 채워지면서 완성된 것들이다. 그것은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짓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봄의 푸릇함이 솟고 여름의 작열이 더해지며 가을과 겨울의 성숙과 쉼이 구분된다. 그의 붓이 농기구라면 물감은 씨알이고 그의 행위는 노동이다.

 

실제로 그의 풍경화는 대부분 농부인 벗이 추천한 풍경들이며 그 농부의 차를 타고 들에 나갔다가 함께 돌아온다. 그는 공주 근방의 작은 마을 원골에 살면서 ‘예즉농 농즉예(藝卽農 農卽藝)’의 미학을 선언하기도 했다. 예술과 농사가 다르지 않다는 것.

 

자연미술은 최대한의 인위와 높은 지식이 아니라 삶의 지혜가 녹아있는 본래적이며 생태적인 미술이다. 그 가치는 생활에 있다. 즉 ‘살림’이다. 예술과 삶이 다르지 않음을 배운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나 마른다 했는데, 비가 왔다. 이제 세상 만물이 소생할 것이다. 그 안에 자연미술의 진리가 있다.

 

김종길 미술평론가·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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