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이 한국의 홍길동으로 태어났다면? 로널드 레이건이 한국의 김갑돌이로 태어났다면?
갤럽이 미국 국민 1천6명에게 물었다. ‘역대 대통령 중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가’. 2007년 2월19일의 조사였는데 답이 의외다. 아브라함 링컨(1위)과 존 F. 케네디(3위)는 그렇다 치자. 워낙 역사 속 전설로 남은 인물들이다. 이 기라성 같은 이름 속에 끼어든 게 로널드 레이건(2위)과 빌 클린턴(4위)이다. 전설로 남기엔 너무도 빈약해 보이는 이들을 미국인들은 역대 최고 반열에 올렸다.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 공황극복의 전설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전부 이들의 뒷자리다.
그래서 해본 나른한 상상이다. 한국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빌 클린턴과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오른 건 미국이어서 가능했다. 뛰어난 능력이나 수려한 외모의 문제가 아니다. 주지사가 대통령 될 수 있는 미국 법률과 도지사·시장이 대통령 될 수 없는 한국법률의 차이다. ‘경선에 나가보겠다’는 의사표시만으로 ‘도지사직 사퇴하라’며 지면이 도배되는 정치문화의 차이다. 역사 속 감동으로 챙겨도 좋을 대통령 카드도 도지사라는 이유로 버려지는 나라. 그게 한국이다.
김문수 지사의 사퇴 요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다분히 법을 넘어선 정치적 정서를 깔고 있다.
대통령에 생각 있으니 사퇴하고 나가라? 이 논리를 대입하면 남아날 도지사가 별로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대통령 되고 싶어 한다. 툭툭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행정행위를 넘어선 정치행위다. 김두관 경남지사는 대권을 입에 달고 산지 꽤 됐다. 이른바 ‘부산을 먹을 수 있는 야권 카드’로 자신을 소개한다. 친노 세력의 좌장 안희정 충남지사는 어떤가. 486 정치세력의 중심으로 향후 권력에 모든 언행이 맞춰져 있다. 가까이는 송영길 인천시장도 있다. 공무원들 월급 챙겨주느라 정신없어 잠시 입을 닫고 있을 뿐이다.
대권싸움에 도정폐기 압박
김 지사와 다를 게 없다. 잠재적 후보군이라는 점이 같고, 대권에 대한 꿈을 밀고 있다는 점이 같다. 언론이 그렇게 쓰고 있다는 점이 같고, 시민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점이 같다. 행정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도리에서 같고, 선거법상 제약을 받는다는 신분에서 같다. 그러면 모두 지사·시장직을 내놔야 한다. 오는 12월19일 보궐선거에는 경기지사뿐 아니라 서울시장, 인천시장, 경남지사, 충남지사도 모조리 다시 뽑아야 한다.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는 게 사퇴의 구분점이 될 순 없다.
모두가 거꾸로 말하고 있다. 지금 압박할 건 사퇴종용이 아니라 책임 완수다.
불과 2년 전에 1천200만 도민이 40억원을 들여 뽑아줬다. 그 때 김 지사가 했던 수 없는 약속이 있다. 무한돌봄사업 하겠다고 약속했고, 사회복지공제회 하겠다고 약속했고, 가정보육교사제 하겠다고 약속했다. 첫 임기 때 약속이행 1등을 했으니-2007 한국 매니페스토 실천본부 평가-2기 때도 잘 할거라고 다들 믿었다. 그런데 도내 곳곳에 널린 숙제거리가 여전하다. 여기저기 그려만 놓은 뉴타운은 어쩔거며, 설계도 못 들어간 GTX(광역급행철도)는 어찌할 거고, 입주자들 암담하게 만든 도청사 이전문제는 어쩔건가. 누구 좋아하라고 이 모든 족쇄를 널름 풀어주자는 건가.
‘김문수 사퇴’가 욕 먹을 일
2011년, 많은 이들이 오세훈 시장을 욕했다. 주민투표로 182억원 날렸다고 욕했고, 보궐선거로 258억원 날렸다고 욕했다. 2008년, 안산지역 7개 시민단체가 시·도의원 4명을 재판에 걸었다. 시민과의 약속을 버리고 총선으로 뛰쳐나갔다는 이유였다. 똑같은 논리다. 지금 욕해야 하는 건 김 지사의 사퇴다. 혈세 낭비를 욕하고 약속 위반을 욕해야 한다. 유독 김 지사에게만 하루라도 빨리 사퇴하라며 안달을 떠는 이 상황. 역(逆)이다. 혹여 ‘도지사 자리’에 눈독 들인 정치적 탐욕에 벌써부터 올라타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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