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원에서 놀자] <2>의정부 ‘의순공주’

'화냥년' 굴레 벗고 구국 여성지도자로 재평가 … 예산확보가 걸림돌

‘화냥년’에서 ‘정신대’까지, 우리의 국력이 약할 때 역사의 희생양이 됐던 여인들이다. 조선의 공주 의순(義順)도 이들과 마찬가지 일생을 살았다. 이름은 이애숙(李愛淑), 열 여섯살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스스로 ‘공녀(貢女·여자를 재물로 바치는 일)’를 자처하면서 조선에서 가장 비운의 공주가 됐다. 나라는 구했건만, 동시에 나라의 치부가 돼 버린 의순공주. 그렇게 의순은 수백년동안을 역사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혔다. 그러나 얼마전부터 그가 살다간 의정부 금오동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그것도 의정부를 대표하는 역사문화원형으로 말이다.

■ 환향녀 그리고 의순공주

단 두어달만에 끝장나버린 병자호란이었지만 임진왜란의 기난긴 7년여의 전쟁과는 또 다른 피해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지나갔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끌려 갔으며, 끌려간 백성의 수는 무려 50여만명에 달했다.

이들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청나라가 조선 백성들에게 매긴 등급에 따라 돈을 지불해야 했다. 국가나 군주가 해결해 줄 수 없던 이 상황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전재산을 팔거나 빚을 내어 청나라에 끌려간 누이나 아내를 데려와야 했다.

이렇게 힘겹게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 하여 온 동네 사람들은 고생했다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향으로 돌아온 많은 환향녀들은 임신을 한 상태였고 환향녀는 화냥년이라하여 멸시의 대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호로(胡虜)자식’(호로는 오랑캐를 뜻한다)이라 불렀다. 사회 전체가 환향녀와 그 자식들에게 냉혹한 시선과 편견의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비단 이런 경우는 힘없는 일반 백성뿐만이 아니라 사대부의 여자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의순공주였다.

북벌을 꿈꿨던 효종 원년(1650년), 청나라에서 사신이 가지고 온 칙서에는 ‘왕의 누이나 딸, 혹은 왕족이나 대신의 딸 중 재색을 겸비한 자들을 뽑아 보내라’고 적혀 있었다. 새로이 조선의 국왕이 된 효종은 청나라의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효종은 자신의 딸들을 오랑캐의 나라에 보낼 마음이 없었다. 대신들과 왕족들 역시 효종의 눈치를 보며 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때 종실 금림군 이개윤이 자신의 딸을 보내겠다고 나섰다. 효종은 고마운 마음에 의순공주로 봉작한다. ‘의순(義順)’, 대의에 순종하라는 뜻이었다.

16세 어린 나이에 머나먼 청나라에 시집간 의순공주의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의순공주가 도르곤에게 시집간지 7개월여만에 도르곤이 세상을 떠났고, 설상가상으로 도르곤이 역모를 획책했다는 혐의를 받고 부관참시되면서 의순공주는 또 다른 황족이자 도르곤의 부하장수였던 박락(博洛)의 첩종이 됐다. 그러나 박락도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7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의순공주 역시 다른 환향녀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 이개윤은 딸을 오랑캐에 팔아 먹은 인물로 매도 당했고, 의순공주 역시 환향녀라는 따가운 질책과 모멸 속에 28세를 끝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단지 여자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굴욕과 비난의 대상이 돼야 했던 조선의 여인들, 환향녀 그리고 의순공주. 국가가, 남자들이 자신들의 무능으로 전쟁속에 내몰리고 공녀로 끌려간 여인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자결이라도 해서 순결을 지키지 못한 여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정녕 수백년전의 과거속 일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일제의 대동아 전쟁속에 끌려간 정신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순공주는 우리만의 비극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약자들이 강자에 의해 짓밟히고 깨지며 유린당해 왔는지 잘 알고 있다. 의순공주 이야기가 세계인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 370여년 만에 ‘화냥년’ 굴레 벗은 의순공주

의정부 금오동 천보산 끝자락에는 작고 초라한 묘가 하나 있다. 의순공주 묘다. 사람들은 ‘족두리 묘’라 부른다.

의순공주 묘가 어떻게 족두리 묘가 됐을까. 그 연유속에는 우리 사회가 드러내기 싫은 치부가 깊게 서려 있었다. 구전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순공주는 청나라로 가지 않았다. 도중에 평안도 정주에서 강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강물에 빠진 시신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의 족두리만 가져와 ‘족두리 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국의 공주가 오랑캐의 나라로 팔려 가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이때문에 의순공주가 ‘화냥년’이라는 굴레를 벗고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해낸 여성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되찾기까지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373년이다. 지난 2009년 의정부문화원(원장 조수기)은 의정부문화테마발굴 프로젝트 사업의 소재로 의순공주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마침내 의순공주는 당당하게 후손들 앞에 섰다. 뮤지컬 ‘의순공주’통해서. 문화원은 완전한 뮤지컬 제작에 앞서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한 중간단계로 쇼케이스 공연을 의정부예술의전당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조수기 의정부문화원장은 “초·중·고등학생을 비롯해 각 세대별로 6천명이 관람을 하고 평가를 진행한 결과, 세대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며 “질적으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가치를 인정받은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후 2011년에는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한 경기도 문화원형 발굴사업 공모에 참여해 의정부의 문화원형 소재로 선정되기도 했다.

문화원은 2012년 말까지 시나리오 작업을 완료하고, 시 승격 50주년이 되는 2013년 10월 완성된 작품을 대중앞에 선보일 계획이다.

물론 아직도 막대한 예산을 확보해야하는 마지막 과제가 남아있다.

“현재로써 가장 필요한 것은 시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예산 확보가 안돼 2010년 쇼케이스 이후 한 걸음 더 내딛기가 힘든 상황이예요.”

현실적인 부분에 대한 박정근 문화원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의정부문화원이 만들고자 하는 뮤지컬 ‘의순공주’는 앞서 제작됐던 대형 역사 뮤지컬 ‘명성황후’, ‘남한산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인물 혹은 사건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역에 숨어 있는 역사적 보물을 찾자는 것이다.

조 원장은 “전국 230개 문화원 가운데 의순공주 같은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원형적 콘텐츠가 없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며 “의정부문화원이 그 시발점이 돼서 좋은 선례를 남긴다면 전국적으로 문화원형 복원의 붐이 일거라 확신한다”고 자신했다.

■ 의순공주여! 역사앞에 다시 서라!

의정부 금오동에는 언제부턴가 의순공주의 넋을 기리는 ‘정주당놀이’가 전해져 오고 있다. 매년 3월 한 많은 일생을 살다간 공주를 달래는 진혼굿을 비롯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잔치를 벌인다.

의정부문화원은 뮤지컬 제작과 함께 ‘정주당놀이’를 향토무형문화재로 등재시키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만약 등재가 이뤄지면 의정부로서는 향토무형문화재 1호를 갖게 되는 셈이다.

박정근 사무국장은 “문화관광자원이 거의 없다시피한 의정부로서는 뮤지컬과 정주당놀이가 또 하나의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의정부 전체적으로 유일하게 수백년전부터 주민들에 의해 순수한 목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만큼 그 복원 가치는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대대로 금오동에서 살아온 금림군 일가는 손가락질을 견디다 못해 이제는 파주며, 포천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다행히 의순공주 묘역 바로 밑에 홀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후손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정주당놀이 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이진형씨다.

“역사적으로 의정부는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했던 곳입니다. 한국전쟁때도 그랬고, 지금도 최전방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죠. 애숙 할머니도 마찬가지셨어요. 몸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거죠. 의순공주와 의정부는 한 몸입니다.”

의정부가 역사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시민들 스스로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라도 의순공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시 진행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윤철원기자 ycw@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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