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장 ⑫] 은희경 소설가

우리 시대 인생과 사랑에 관한 매력적인 성찰과 사색

은희경(54)이 돌아왔다. 이름만으로도 독자를 설레게 하는 그녀는 연애소설 ‘태연한 인생’(창비刊)을 들고 왔다. 연애소설치곤 제목이 참 얄궂다. 어디 우리네 인생이 태연한가. 태연한 척 하는 거지. 그리고 팍팍한 삶이 우리를 태연하게 내버려두기라도 하는가. 반문을 갖게 하는 책 제목이다.

등단 16년차 중견작가로 매 작품마다 다양한 변신을 선보여온 그녀의 작품세계는 더 깊어지고 여유로움마저 갖추었다. 자칫 작가만의 패턴과 관습이 생기기 마련. 은희경은 이번 일곱번째 장편소설을 통해 익숙한 것으로부터 도망치기라도 하듯 ‘유쾌한 변주’를 거듭했다.

작가의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이번 작품은 다소 애매모호하거나, 낯설거나, 색다르게 읽힐 것이다. 7월 5일 서울 강남에서 은희경 작가를 만났다.

비오는 목요일 저녁, 검은 땡땡이 치마에 레인부츠를 매치시킨 작가는 50대라곤 믿기지 않는 생기발랄한 소녀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말하는 태연한 인생, 태연한 연애, 태연한 작품 이야기를 태연스럽게 들어봤다.

나는 성실한 작가다

은희경은 두 자녀를 키우며 직장맘으로 평범하게 살다 30대 중반의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고 대형사고를 쳤다. 1995년 ‘이렇게 살다 내 인생 끝나고 말지’하는 생각에 노트북 하나 달랑 챙겨 들고 지방에 내려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그녀의 인생을 바꿨다. 대형사고는 ‘3점짜리 만루홈런’이었다.

작가는 서른다섯 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그 해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을 발표하며 한국 문단의 스타로 떠올랐다.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거머쥔 작가로 승승장구였다.

등단 후, 1~2년을 주기로 꾸준히 책을 냈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8), ‘마이너리그’(2001), ‘비밀과 거짓말’(2005), ‘그것은 꿈이었을까’(2008),  ‘소년을 위로해줘’(2010) 등의 장편소설과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1996),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1999),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2007) 등 은희경은 쉼 없이 작품을 쏟아냈다. 성실함 그 자체였다. 

특히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소설, 작가의 출세작이기도 한 ‘새의 선물’은 아직도 통과의례와 같은 책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은희경은 본인 스스로를 “나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성실한 작가 같다.”고 고백한다.

모범생 작가의 이번 장편소설 ‘태연한 인생’은 아주 우연하게 시작됐다.

“지난해 3월,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할 장편소설 첫 회분을 쓰기 위해 토지문학관 작가집필실에 들어갔다. 오래전부터 써보고 싶은 얘기가 있었고 준비도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뭔가에 화가 나고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던 일을 계속하려는 나에게 환멸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서 전혀 다른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비호감 캐릭터의 한물간 40대 소설가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아무래도 우연한 소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인생과 사랑의 변주… 마음가는대로 자판을 두드렸다

작가의 예전 작품에 익숙한 독자라면 서술이 때론 장황하다 싶고, 복합적 구성에 잦은 형식 변주가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길 수도 있다. 작가의 변주가 다소 불편한 독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방향을 틀어서 탄생한 작품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조물락거리지 않았다. 나름 중견작가인데 눈치 안 보고 썼다. 연재하는 동안 일어났던 일들, 만났던 사람, 눈에 띄는 풍경이 작품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소설 마지막 장면은 연극적으로 쓰고 싶었다. 솔직히 변주를 많이 했다. 전작과 다르게 배짱 있게 쓴 작품이 맞다.”

배짱 있게 쓴 ‘태연한 인생’…패턴에 갇혀 있는 인간상 조명

배짱 있게 쓴 ‘태연한 인생’의 첫 장면은 사랑에 빠진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가 달달하게 그려진다.

‘그녀는 공중전화부수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연녹색 원피스와 흰 스웨터 차림이었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녀의 얼굴은 희고 투명했다.’(8p)

시작은 사랑의 서정시대를 예고하는 듯하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한다.

남자 주인공 ‘요셉’은 단 한 줄의 소설도 쓰지 못하는 위선적이고 자기기만적인 퇴락한 작가다. 요셉은 말한다. “착한 여자들은 말야, 패턴을 강요해. 그것처럼 남자를 지겹게 만드는 건 없을 걸.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변하잖아. 당연하지. 안 죽었으니까.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변하는 거거든.”

반면 세상 끝, 열정의 끝에서 사라진 여인 ‘류’는 “매혹은 지속되지 않아, 열정에도 일정한 분량이 있어.

그 한시성이 사랑을 더욱 열렬하게 만들지……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놓고 되돌아와버린 것을 후회하진 않아”라며 매혹에 이끌려 한때 요셉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마지막 한 걸음 앞에서 그를 떠난다.

‘태연한 인생’을 이끌어가는 것은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요셉’의 일상과 ‘류’의 과거사가 교차되며 두 세계의 겹침과 엇갈림을 그려나간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타락한 세계를 향해 던지는 ‘요셉’의 가차 없는 독설은 날카로우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한 연민을 자아내고, 감추어진 듯 언뜻언뜻 드러나는 ‘류’의 서사는 아련하고 서정적인 색채로 이야기 전체를 감싸 안는다. 그리고 곳곳에 깔린 삶과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이 섬세한 문장으로 겹겹의 층을 이루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또 다른 시선으로 새로운 단편소설 집필 중

“이번 작품에 대해 비판도 들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잘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내가 못하는 것을 그럭저럭 하면서 만족스러워하는 스타일이다. 소설은 표면적으로 ‘요셉’과 ‘류’의 미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깊게는 패턴에 갇혀 있는 인간상을 조명하고 개인의 고유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개인은 다 고유하니깐 같은 틀로 재단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오래 안 쓰면 우울해요

전북 고창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은희경은 소설가가 되기 전에는 사회 시스템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착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마음 속으론 이데올로기를 동의하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모범생이었다. 이런 이중적인 작가의 DNA는 작품 캐릭터와 스토리에 녹아 있다.

그래서 이번 소설을 ‘개인의 고유성을 사수하려는 절망적 시도’와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자의 비감(悲感)’(염무웅 문학평론가)으로 읽을 수도, 류와 그 어머니의 ‘전사(前史)까지 포함한 적막한 일대기’(김혜리 기자)로 읽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혹은 사랑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혹에 초점을 맞출 수도, 사랑이 끝난 후의 고독과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 읽을 수도 있다.

독자들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엔 묵직하고 어딘가 쓸쓸하기까지 한 느낌을 더하는 문장들이 빼곡한 ‘태연한 인생’을 곱씹으며 끙끙거리는데 은희경 작가는 태연하게 이번 작품으로부터 퇴장하고 있다.

“빨리 이 녀석(소설)이랑 헤어져야 한다.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들떠 있는 요즘, 이 사랑이 식어야겠구나 생각한다. 그래야 다른 소설을 쓸 수 있으니깐. 지금은 사랑이 식어가는 과정이다.”

베테랑답게 이별에 익숙한 그녀는 벌써 새로운 단편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했다. 신작의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노련미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항상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오래 안 쓰면 우울해진다. ‘성실노력형’에 속하는 작가다. 이번 작품의 경우 패턴화 되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아마도 내게 소설쓰기는 내 고유성을 각성하고, 지키기 위한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시대 인생과 사랑에 관한 매력적인 성찰과 사색을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녹여낸 은희경. 사랑과 상실과 고독에 대한 빛나는 문장들이 다시 한 번 우리를 은희경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글·사진 _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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