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삼국시대 당성의 수수께끼

우리나라의 곳곳에는 고대 산성이 많이 남아 있다. 경기도 일대의 주요한 교통요충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산성이 있다. 남양에서 서해 바다로 가다 보면 구봉산이 있고 그 산꼭대기에 산성이 길게 둘러져 있다. 바로 당성(唐城)이라고 불리는 삼국시대의 성이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경기지역에서 가장 큰 성으로 학술적으로 대단히 중요해 오래전에 국가사적 217호로 정해져 보호되고 있다. 당성은 고대의 유명한 당항성(黨項城)에 비정되기도 하는데 고대 삼국의 세력이 교차되는 지점이며 황해교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산성의 꼭대기에 올라서면 망해루터가 남아 있고 이 터 앞에서 내려다보는 서해안의 풍광은 장대한 파노라마를 이룬다.

이 성이 현대에 던지는 의미는 아마도 황해문화교류 복원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황해는 남쪽으로 동지나해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동아시아의 지중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황해가 동아시아사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 교류에 미친 영향은 지대할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당성은 고대로부터 이 황해연안 교류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해문화교류 거점 추정

왜냐하면, 중국의 산동과 마주하여 산동에서 오는 교통의 종착이 될 뿐 아니라 중국으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라 고승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가기 위해 거쳐갔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산동 반도의 끝에는 진시황의 사신들이 동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떠난 자리가 있는데 이 또한 산동이 한반도로 오는 교통거점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유적인 셈이다. 안산 지역의 설화에 고려의 장수가 서해에서 풍랑에 밀려 도착한 곳이 바로 시화쪽이라고 전하는 것을 봐도 산동과 당성 지역 사이에 자연적인 해양루트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하간에 시화호 지역에는 중국과의 정치나 군사 그리고 교역 등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 당성은 이러한 교류의 거점으로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도의 육곡고분에서는 청동제 중국인장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시 교역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정황이나 기록으로 볼 때 당성은 고대 실크로드의 한반도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 구법승들이 산동을 통해서 산서 서안지역으로 가는 것으로 보면 거꾸로 중국 내의 실크로드 문화는 산서지역에서 산동으로 이르게 되고 다시 황해를 건너게 되는데 바로 당성이 도착지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오늘날에는 평택항이 대중국 교역을 담당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당성 앞의 넓은 갯펄지가 정박이 용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당성은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문화교류사적인 거점유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당성의 역사성 재인식돼야

그동안의 고고학적인 조사에서 당성의 구조나 건물, 그리고 그 변화의 역사들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현재 전해지는 그리고 추정되는 많은 내용들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원효나 의상과 관련된 유적이나 교역과 관련된 유물 등이 아직도 확인된 것이 별로 없다. 중국은 과거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이고 우리의 미래전략의 가장 중심에 서 있어야 할 나라인 점에서 당성 역사의 재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바로 경기만과 시화호 일대가 우리 민족사에 어느 정도 중요한 지역이었던가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만일 앞으로 정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 새로운 자료가 얻어지게 된다면 당성은 중국의 산동과 산서 서안을 연결하고 한반도 내에서는 경주로 연결해 고대의 실크로드의 한반도 관문으로서 그 역사성이 확인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발굴과 함께 잘 보존해 우리 젊은이들이 황해지역의 고대 국제문화흐름을 체험할 수 있고 세계인으로서 꿈을 키울 수 있는 배움터로서 당성이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배기동 전곡선사박물관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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