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들과 돌아왔다
김애란이 돌아왔다. 이번엔 대한민국 ‘루저(실패자)’들과 함께 말이다. 그녀의 세 번째 소설집 ‘비행운’(문학과지성사刊)에는 ‘꿈 루저’부터 ‘지방 루저’, ‘집 루저’, ‘취업 루저’까지 지지리 복도 없는 불행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비극의 향연’이라고, 막막하고 또 막막한 존재들의 ‘종합선물세트’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김애란 작가를 만나야겠다 마음 먹었다. ‘어쩜 이리도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골라 썼는지’ 따지고(?) 싶었다.
지난 7월 26일 서울 홍대 창비카페에서 만난 김애란 작가는 아주 조용히, 말을 아끼며, 아니 단어 하나, 하나를 곱씹으며 ‘비행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근두근 내 인생’으로 ‘만루홈런’
김애란은 운이 좋은 작가다. 22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재학시절 작가가 됐다. 올해로 만 10년차다. 그 동안 상복도 유독 많았다. 이효석문학상, 신동엽창작상,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등 학창시절 받은 상보다 많은 상을 탔다.
작가도 상복을 인정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지나치게 좋은 일이 많이 생기면 시험 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 가운데 여러가지 일들로 인해 상복이 많았습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버티라는 의미로 생각해요. ”
‘달려라, 아비(창비, 2005)’,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 두 권의 소설집만으로 문단과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애란은 지난해 출간한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刊)으로 만루홈런을 쳤다.
김애란이 지난 2010년 여름부터 2011년 봄까지 계간 <창작과 비평> 에 연재한 첫 장편소설로 연재 당시부터 문단과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두근두근 내 인생’은 조로증에 걸려 80세 노인으로 보이는 17세 소년. 그리고 이 소년을 17세에 낳은 어린 부모의 청춘과 사랑에 대한 눈부신 이야기를 그렸다. 1년 만에 25만부가 팔려 나갔다. 창작과>
그런데 정작 김애란은 “반응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고 시침미를 뗀다. 이는 조용하고 정적인 작가 성격에서 오는 반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작가가 느끼고, 못 느끼고는 중요치 않다. 출간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의 첫 번째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의 반응은 뜨겁다.
무엇보다 담백하고 신선한 문장들로 담아낸 벅찬 생의 한순간과 사랑에 대한 반짝이는 통찰이 읽는 내내 미소를 머금게 하고 폭소를 터뜨리게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울컥, 눈물을 감출 수 없게 만들게 하는 김애란식 유머가 통했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청춘, 그리고 인생을 특유의 생기발랄한 문장으로 그려냈다.
그래서 독자들 뿐만 아니라 평단의 반응도 호평 일색. “운명적인 이야기꾼”(황석영), “비극에서 낙천의 보석을 골라내는 타고난 재능”(성석제), “박수를 아낄 생각이 없다”(신형철) 등. 작가마저 홀릭시킨 김애란이 한국 문단의 차세대 대표 작가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김애란식 비극’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프다
그런데 2012년 무슨 일일까? 그녀가 변했다. 그 것도 아주 ‘독하게’ 말이다.
작가는 지난해 결혼해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새색시다. 그런데 이번에 들고 나온 소설집 ‘비행운’은 새색시가 썼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우울하고, 칙칙하고, 막막하다.
20대에서 30대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의 작품은 ‘달달함’을 버렸다. 대신 ‘쓰디 쓴’ 일상과 공간을 악랄하게 그려내고 있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벌레들’, ‘물속 골리앗’,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하루의 축’, ‘큐티클’, ‘호텔 니약 따’, ‘서른’ 등 2008년부터 쓴 총 8편의 단편을 모은 이 책은 새로운 삶을 동경하며 비행운(飛行雲)을 꿈꾸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연쇄적 불운의 비행운(非幸運)에 발목 잡힌 사람들 이야기다.
책을 읽다보면 ‘희망’이나 ‘행운’ 등의 단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루의 축’에 등장하는 인천공항에서 청소 일을 하는 50대 중반 기옥씨는 스트레스성 탈모 증상을 보인다. 내일은 결코 일하지 않고 쉴 것이라고 다짐하던 그녀는, ‘엄마, 사식 좀…’이라는 아들의 편지를 공항에서 읽고 자신의 흉한 머리를 가렸던 챙이 넓은 모자를 벗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파트장에게 달려가 휴일근무를 자청한다.
작가는 공항에서 기옥씨를 만들었다고 했다.
“작가들 가운데 취재에 많은 공을 들이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글을 쓸 때 취재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예요. 그런데 ‘하루의 축’의 경우 공항에서 일하는 청소부의 이야기인만큼 두번 정도 공항에 가서 긴 시간을 섬세하게 관찰했어요.”
김애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 대신 더 독한 문장과 불행한 인물들을 전면 배치시킨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주인공 서미영은 정말이지 찌질한 여자다. 대학시절 좋아했던 남자선배의 연락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만나러 간다. 선배는 자신이 일하는 케이블방송국 ‘먹기 대회 프로그램’에 엑스트라로 출연해 달라고 요청하고 그녀는 그렇게 한다.
또 ‘서른’에선 ‘합격해야 탈출할 수 있는 섬’, 노량도(노량진)의 재수생으로 20대를 시작한 그녀가 등장한다. 6번의 이사와 10여 개 아르바이트로 20대를 소진하지만 대학을 마친 뒤엔 막막한 현실만이 그녀를 기다린다. 남자친구의 배신으로 다단계판매 조직에 발을 들인 주인공은 자신이 다단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학원 제자인 혜미를 끌어들인다. 빚에 시달리던 혜미는 자살을 시도하고 결국 식물인간이 된다.
표제작인 비행운(飛行雲)은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형성되는 구름을 말하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행운이 없다는 뜻의 비행운(非幸運)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왜 작가는 이리도 독하게 집이 없고, 돈이 없고, 운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쏟아낸 것일까?
김애란은 “낙관하기 위해선 먼저 비관해야 한다”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단아한 외모에 숨어살고 있는 작가의 냉정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러면서 작가는 “크레인 위에서 체불 임금을 요구하다 실족사한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당뇨 쇼크로 잃고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호우로 뒤덮인 흙탕물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물속 골리앗’이 가장 애착이 갑니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작가는 비극에 몰입하고 또 몰입했다. ‘김애란식 비극’으로 행복을 기다리느라 지겨웠던, 비행운과 맞씨름 하느라 힘들었을 친구들에게 행운을 빌어주면서 작가는 조용히 퇴장한다. 어설픈 위로나 충고 따위도 없다.
문학평론가 박준석이 말했듯 “김애란 소설은 우선 안부를 묻고 전하는 이야기, 말하자면 하이-스토리hi-story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안부에는 개인적인 소소한 안녕을 넘어선 어떤 윤리”를 가지고 동세대의 실존적인 고민을 드러내며 살아남은 자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친구처럼 곁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러 온 듯 이번 소설집에서 김애란은 자신의 매력을 백분 발휘한다. 그리고 좀더 다양한 세대와 공간을 아우르며 ‘확장’되기도 했다.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그 이름”
‘꿈 루저’, ‘지방 루저’, ‘집 루저’, ‘취업 루저’가 등장하는 ‘김애란식 비극’은 이 땅의 2030세대가 처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라 정리했다.
등록금 1천만원 시대에 힘들게 졸업장을 따도 취직이 어렵고, 그나마 어렵게 구한 직장은 월 88만원짜리 비정규직인데 자고 나면 월세와 밥값, 기름값이 오른다. 그래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삼포세대’로 불리는 우리들의 언니, 오빠, 친구, 동생들이 허다하다.
그녀 또한 인천에서 태어나 서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공간이동을 경험해야 했다.
자유분방하고 자연스러웠던 작가의 유년시절과 달리 그녀의 20대도 ‘비행운’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비행운을 꿈꾸며, 때론 비행운(非幸運)의 악순환에 빠지고, 좌절하고, 극복하고 그렇게 뜨거운 청춘을 보냈다. 힘들지만 성실하게 꿋꿋하게 버텨왔다.
“저는 시대에 좀 뒤떨어질 수 있지만 SNS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 하고 싶은 욕구도 있지만 소통에 있어서는 욕구불만의 상태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소통의 양이 중요한 것 같지 않아요.”
젊은 작가치곤 김애란은 상당히 정적이었다. ‘수다쟁이’를 상상했던 기자의 판단오류였다. 대신 작가는 2012년 가장 감동적이고, 슬픈 이야기를 통해 가장 진실한 숨결과 교감하는 행운은 누리게 해주었다.
김애란은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그 이름, 문학’을 통해 오늘도 세상을 성실하게 바라보고, 성실하게 쓰고, 성실하게 성장하고 있다.
글 _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 _ 추상철 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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