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도 여느 인간과 함께 행복한 삶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위해 지금도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인의 영적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삶의 의미를 귀담아 듣습니다.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습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또는 어떤 종교를 믿든, 우리 모두는 삶에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삶의 모든 행위가 행복을 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성자께서 제시하는 행복이란 어떤 형태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마음의 상태입니다. 한 예를 들어서 우리는 보통 탐욕의 반대를 무욕이라 하는데 이 분은 이것을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즉 탐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만족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현대는 돈과 같은 재물들이 인간이 꿈꾸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경제 발전을 제일의 정책으로 내세우면서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으려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경제가 발전되고 결국은 여기서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점에 다다를 수 있다고 기대하는 유물사관적 집단들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은 유물사관적 사고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우리는 산업발전 과정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도록 제시하신 분이 ‘무소유’의 법정스님과 ‘무저항주의’를 내세운 인도의 성인 간디입니다. 즉 소박함과 우직한 삶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오히려 경제발전에 따른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인간의 감성적인 면에서 볼 때 더 나은 것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달라이 라마가 제시하는 행복의 개념입니다. 그러면 친절함과 자비심이 쉽게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구성요소가 평화로움과 고요함인데 이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랑과 자비심에서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대형 종교 집단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물질만능에 빠져 있는 사회보다도 더 재물이나 명예 같은 것을 누리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거기엔 인간의 욕망을 채우려는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독버섯이 도사려 있음을 우리 가톨릭교회는 과거에 중세기를 통해서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대형 종교 집단에선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재산분쟁과 자리다툼이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더 가관인 것은 신께서 자기 쪽 편을 들어 축복해 준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목불인견입니다. 요새 대형 금융부정 사건들은 대부분 대형 종교 집단에 소속된 신자들이 연루돼 있습니다. 허긴 유태인의 역사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게다가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참 행복의 조건인 마태오 복음 5장 1절-12절과 루카 복음 6장 20절-23절을 악용해 지금 예수님께서 자기들 편에 서 있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우리 종교집단도 유물사관에 젖어서 신도들이 간절히 바라는 예수님의 참다운 행복을 세속적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얻어지는 여러 기기들과 방법들, 그리고 재물들을 사용하면서도 그와 함께 따라오는 무서운 독소들에 빠지지 않고 예수님이 제시하는 진정한 행복과 달라이 라마가 전하는 행복을 향해 조심조심 이웃과 함께 재물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최재용 신부·천주교 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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