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ㆍ교과서ㆍ부모에게서 찾지 못한 '힐링', 연극에서 길을 찾다
올 초 전면 시행된 주5일 수업으로 ‘놀토’를 겨냥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갑자기 생긴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인지, 정말 학생들의 자기계발에 적합한 지 따질 틈도 없었다. 비슷비슷한 문화예술 강좌는 맞벌이 부모와 학교를 대신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고등학생을 위한 것은 찾기 힘들다.
‘불량’ 청소년은 장난꾸러기보다 가르치기 어렵고 ‘모범’ 학생은 입시와 취업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실에 연일 언론을 통해 터져나오는 청소년들의 자살과 집단폭행 등은 예정된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다. 방법은 없을까. 광주시의 한 허름한 지하 극장에서 만난 고등학생들이 그 답을 내놨다.
▲ 문화예술교육의 목적은 예술 아닌 인간
태풍 ‘산바’가 들이닥쳤던 지난 17일 오후 6시 광주예술극장(광주시 송정동 소재). 세차게 퍼붓는 빗줄기에 인터뷰 대상조차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까’ 우려하며 들어섰다.
기우였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고등학생 30여명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 1층 공연장과 사무실, 화장실 등 구석구석 역동적으로 청소중이다. 낯선 기자를 보고선 90도로 인사하고 금세 제 할일에 몰두하고, 한켠에선 발성 연습을 하는 지 한 음을 길게 내지른다.
잠시 후 모두 무대로 모인다. 선생님을 따라 스트레칭을 하더니 ‘맘마미아’의 한 뮤지컬 넘버를 부르며 춤동작을 맞춰본다.
이내 본게임을 시작한다. 대본을 든 아이들이 한 장면을 두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열정적으로 동선을 조율하며 그네들만의 세계로 빠진다.
무미건조한 모범생과 아슬아슬한 탈선학생으로 점철되는 기존의 청소년 이미지와 전혀 다르다. 마치 다른 세계, 먼 나라의 아이들같다.
“저도 처음에는 엄청 소심했는데 연극을 하면서 정말 많이 변했어요. 선생님과 친구들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서로 돕는 방법을 익히면서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이들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박혜민(19· 경화잉글리시비즈니스고등학교)양의 말에서 그 색다른 이미지의 출발점이 드러난다. ‘연극’이다.
이 학생들은 경화여고, 경화이비고, 곤지암고, 광남고, 광주고, 중앙고, 광주 지역의 6개 고등학교의 연극 동아리에서 제각각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광주예술극장에 모이면 ‘광주시연극유스씨어터’의 단원으로 하나가 된다. 광주예술극장은 경화여고 교사로 연극 동아리를 지도했던 이기복 광주시연극협회장이 8년전 소극장이자 지역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교육 장소로 마련했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작품을 만들며 성별, 나이, 학교의 경계는 사라지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한다. 한 아이는 죽은 자신의 형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슬픔을 쏟아냈고, 또 다른 학생은 자연스러운 청소년기의 성적 호기심과 행위에 대한 사회의 불편한 시선을 공유하며 대안을 모색했다. 학교와 교과서, 부모에게서 찾지 못한 길을 연극을 계기로 함께 찾고 있는 것이다.
박양은 “고등학교 졸업 후 연극배우를 하면서 관련 교직 과목을 이수하고 광주에서 저같은 학생들에게 직접 가르치고 싶다”며 “더 많은 사람이 연극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환한 미소로 장래희망을 밝혔다.
예술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창조적 활동으로 자아를 탐험하고 실현하는 계기가 된다고 했다.
혹자는 창조성이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건강을 나타낸다고 정의했다.
이날 세찬 비바람을 뚫고 소극장에 모여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작품을 연습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예술교육의 효과와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10월이면 아이들이 눈치보지 않고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연극을 즐기고 연습할 수 있는 ‘청석에듀씨어터’가 개관해요. 완전한 극장의 모습을 갖췄지만 공연보다 교육 기능을 더 우선시하는, 국내 유일한 공간일꺼에요.”
광주예술극장을 운영해 온 이기복 회장(57)이 새로 문을 열 청석에듀씨어터를 자랑하며 연신 함박웃음이다.
8년 전 사비를 털어 올해 영화관 하나 들어설 정도로 열악한 환경의 광주에 소극장을 만들었던 그는 교사 퇴직금을 쏟아부어 더 크고 넓은 공연장을 마련했다.
“1981년 경화여고로 발령받아 왔을 때 광주는 도농복합지였는데 가출하고 사고치는 학생들이 정말 많았어요. 연극반 만들어 공연을 했는데 변화가 있더군요. 지역의 모든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공간을 만들었죠.”
그 덕에 광주에서만 3번이나 전국청소년연극제의 대상 수상작이 나왔다. 2007년 경화여고, 2009년 광주고, 2010년 경화이비고 등이다.
극장 상주 전문 극단 단원들에 삼삼오오 모인 청소년만 70명을 육박하면서 연습 공간은 턱없이 부족해졌고, 이 회장은 다시 새로운 공간 마련에 팔을 걷어부쳤다.
지금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앞으로 프로극단에 입단하거나 전공으로 선택, 향후 다시 자신의 고향에 돌아와 공연하고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이야말로 수 십억원을 들여 하드웨어를 마련하는 것보다 낙후된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는 방법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현재 이곳에서 연극을 배우는 학생들의 꿈이 ‘연극배우이자 다시 고향에서 자신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니 이 회장의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
문화예술로 지역사회 발전의 롤 모델을 만들고 있는 그가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에서 강조하는 것은 ‘능동’이다.
“문화예술교육의 대부분이 학생을 수동적인 수혜자로 보는 것이 문제에요. 전문가는 아이들의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역할로 충분해요.”
올 초부터 경기문화재단의 2012지역특성화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으로 지역의 고등학생 37명을 대상으로 운영중인 ‘도농복합지역 청소년들이 만드는 창작연극제-우리 이야기를 들어봐!’ 역시 능동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참여 고등학생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넣고 이를 대본으로 구성했다. 조명과 음향, 무대 디자인 등 연극 제작과 공연의 모든 것을 직접 만든다. 이를 통해 탄생한 4개 작품은 오는 12월8일 청석씨어터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그때까지 교사의 역할은 그저 지켜보고 도움을 청할때 손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류설아기자 rsa11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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