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좋다] 신탄리행 통근열차를 타고 떠나다
아버지 빛바랜 유언장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원산시 유동 101번지 주소를 들고
경원선 열차는 신바람이 난 듯
녹슨 목청을 돋우며 북으로 달려간다 (이하 생략)
경원선 신탄리역의 ‘시인이 머무는 자리, 신탄리역 쉼터’에 붙어 있는 김경문 시인의 시구다. 시인은 결국 철길이 끊겨 아버지의 고향마을에 가지 못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 역이 바로 경원선 최북단 종착역이다.
신탄리역은 1913년 7월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호장’(철도역의 한 종류. 보통 여객이나 화물이 아닌 열차의 교행을 위해 설치된 역이나, 여객 취급을 하는 경우도 있음)의 역할을 했다. 해방 전까지는 그렇게 유지됐다.
그러나 광복이 되자 북한에 배속되었다가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1년 9월 28일 남한에 의해 수복되어 1961년 지금의 역 건물이 지어졌다.
역 건물이래야 예나 지금이나 아담한 간이역 수준이다. 사람들은 이 작은 역에 내려 인근 고대산에 오른다. 그러면서 고대산이 거친 남성미를 지녔다고들 한다. 어떤 남성미이기에 거칠다고 했을까?
신탄리는 본래 ‘새숯막’이었다. 옛날 숯을 구워 생활을 해 오던 사람들이 살았다. 철도가 생기자 더 크게 번창해 마을 이름도 한자로 바꾸어 신탄리가 된 것이다.
요즘 지명 바꾸기 운동도 한창인데 여기도 ‘새숯막’으로 환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역이지만 여러 가지 풍경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역 구내에 있는 작은 박물관이다. 이름하여 ‘나의 살던 고향’인데, 그렇다고 대단한 소장품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지역에서 농사짓고 살아온 농기구들이 대부분이다.
신탄리역 이전은 대광리역이다. 이곳은 군인들이 많은 지역 특성상 사병들이 주 이용고객이다. 주말이면 자주 보이는 것이 면회 온 연인들의 만남과 헤어짐이다. 나이든 어른들에게는 옛 추억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는 장면으로 예나 지금이나 애틋함은 똑같은 모습이다.
몇 년 전 역 앞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던 한 커플을 만나 몇 마디 얘기를 나눴는데, 제대 후 홍대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어서는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끈끈하게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날려 왔다. 엄청 흐뭇했다.
역세권이라 말할 것도 없지만 대광리역 앞마을은 신탄리 보다는 크다. 맛집도 많고 다방도 많다. 특히 ‘토끼탕’과 ‘보신탕’ 음식점들이 유명하다. 그런 대광리역이니 평일에도 나이든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서울의 맛있다는 음식점보다 값도 싸고 맛도 좋다. 왜 그런지 알아보려 근처 다방에 들리니 종업원들이 모두 늙수그레한 중년들이다. 우선 그것부터 왜 그러냐 물어보니, 그냥 요새 그렇단다. 그리고는 여기 와서 일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얘기는 꺼내봐야 헛일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근처 군부대에서 나오는 잔반 때문에 개 사육이 늘어나고 그래서 보신탕이 성업하게 되었다는 전설 아닌 전설에 방점을 두어야 할 듯. 그나저나 동네 어른들은 보신탕 드시고 어디다 힘을 쓰시는 건지? 잇따라 꼬리를 무는 궁금증에 입가에 절러 미소가 돌았다.
글·사진 _ 김란기(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이정환(미아리사진방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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