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기행을 떠나다]5. 유네스코선정 ‘2012세계문화기념인물’

21세기 다산학 연구의 ‘새로운 모색’ 필요

1. ‘다산문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이었다

2. 밤남정 주막집의 두 형제이별

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5. 유네스코선정 ‘2012세계문화기념인물’

■ 수기치인(修己治人), 유학진면목 회복을 필생사명으로

유배 중 다산 정약용은 ‘아들 학유에게 주는 글’에서 “내 나이 스무 살 때 우주(宇宙)간의 모든 일을 일제히 해결하고, 일제히 정돈하고 싶었다”고 밝힌바 있다. 젊은시절 벌써 광대무변(廣大無邊)했던 다산의 기개와 포부를 읽게 해주는 대목이다. 대과 급제(28세, 1790)후 10년간 정조대왕의 총애 속에, 거칠 것 없이 고관대작의 벼슬을 두루 거쳤던 탁월한 조정대신이 어느날 비운의 귀양길(1801)에 오르게 된다. 그로부터 다산은 산천오지에 갇힌 채, 고독한 학문탐구에 들어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압축되는 유학(儒學)의 진면목회복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고, 필생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18년에 걸친 유배기간 동안 경전(經典)연구에 전념, 저술한 것이 총 230권이었고 귀배 후 3년간 수정보완, 추가하여 시경·중용·대학 등 경집만 250권 88책을 완간했다. 또한 문집 87권, 경세유표 등 잡찬 166권 등 총 503권에 달하는 불굴의 대저작을 세상에 내놓았다(새조선, 296).

불운한 선비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가(儒家)학문세계를 정밀탐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聖人)의 본지(本旨)를 재해석 대단원의 저술로 후세에 헌상(獻上)했다. 우리는 이를 통칭해 ‘다산경학(茶山經學)’이라 부른다. 

■ 다산실학은 한대(漢代)이래 최대 ‘창견(創見)’제시

한국실학학회 주최로 지난 6월9일 열린 ‘다산 탄신250주년기념 학술대회’에서 토론참석자들은 “다산경학의 특징 하나는, 수많은 창견(創見)을 제시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는데 견해를 함께했다. 창견을 담지(擔持)하는 사상적 배경과 지향점에 대해서는 원시 유학(儒學)의 진면모 회복과, 탁고개제(托古改制)를 위한 창의적 의견을 업적으로 남겼다는 뜻으로 읽힌다.

한 대(漢代) 이래, 한자문화권의 수많은 경학자 가운데서 가장 많은 창의적 시각과 신설을 제시한 학자로 다산을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터이다. 어쩌면 봉건시대에 명멸했던 수많은 경학자들 가운데 그가 정점에 서 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보는 이유다.

다산 선생이 대단하다 싶은 건, 그처럼 방대한 유교사상과 철학을 섭렵해 자신의 ‘실학사상’과 ‘실천철학’으로 담아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거대 유학세계를 ‘다산실학’이라는 그 만의 특허 프리즘에 통과시켜 자기방식으로 재구성, 재해석한 그 원대함과 도도함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학’프리즘에 넣어 거대 유학 재해석

다상사상(茶山思想)의 ‘큰 저수지’에는 6경(經)4서(書)에 담겨있는 지혜의 총서가 망라돼 있다. 다산이 이상으로 여겼던 유교사상의 창건계승자는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등 8인 이었다. 다산 의식의 묘당(廟堂)에는 이 여덟 명의 신(神)이 되어 모셔져 있을 뿐이다. 공자이후 유가의 적통임을 자부하였던 무수한 유학지상주의자들 마저 이 묘당에 들지 못했다.

다산은 모든 학문의 표준을 공자에게 집중시키고, 나아가 도덕의 표준에도 공자를 상정하고 있다. 다산이 공자와 유가의 대표적인 경전인 6경에 대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상이한 견해에 어떤 이해를 가졌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 등 6경이 대부분 공자의 손을 거쳤다고 믿고 있음은 금문학파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또한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4서를 섭렵, 실증적 연구를 집중함으로서 기존의 성리학적 해석에서 벗어나 실학의 새로운 관점을 보여 주었다. 그렇듯 다산은 6경4서에 담긴 심오한 제도와 정신을, 현실정치 및 사회에 맞게 구현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 목민심서, “고을수령(군수)은 임금과 같아”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고을현감(군수)은 한 나라의 임금의 역할과 같다’고 정의했다. 현감, 곧 수령은 그 고을에 관한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지니고 있어 한 나라의 군주(君主)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수령은 제후(諸侯)와 같다. 만 백성을 주재하니

하루에 만기(滿機)를 처리한다.

그 정도야 약하지만 본질은 다름이 없다.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자와

비록 크고 작음이 다르나 처지는 실로 같은 것이다.

- 목민심서 -

다산은 젊은시절, 부친의 부임지를 따라 몇몇 고을의 관아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아버지 정재원(1730~1792)은 현감 두 곳, 군수 한곳, 도호부사 한곳, 목사 한곳 등 여러 지방을 돌며 수령을 지냈다. 그 때마다 다산은 아버지를 따라가 살게된다. 자연히 아버지로부터 고을 다스리는 법을 보고 배워 두루 익숙하게 된 배경이다. 이런 경험은 후일 목민심서를 저술하는데 매우 유효했다.

신혼 초, 다산일생에도 가장 꿈같은 시절이 있었다. 다산부부는 화순현감(군수)으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 나선다. 열여섯 살 되던 해(1777년) 음력 10월로 초겨울 이었다. 부친은 이때 경기도 연천 현감을 지낸지 10년 만의 지방수령 전직발령이었다. 승지벼슬을 한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결혼한 지 갓 1년이 된 다산은 아내를 데리고 아버지와 함께 새 부임지인 전라도 화순에 도착했다.

■ 화순고을서 신혼생활…꿈같은 시기

화순고을에서 시작한 호남 땅의 생활로 다산은 이때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신관 사또의 자제로 글 잘하고 시 잘 짓는 문사(文士)는 아름다운 남도경관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곳 선비들과 어울리면서 명승지를 관람하며 시문 짓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산은 또 친구들과 어울려 전라도 풍광 중에서도 온 나라에 이름이 높은 화순 동복의 적벽강(赤壁江)과 강변풍치와 어우러진 물염정(勿染亭)을 둘러보고 감탄하며 ‘적벽강 물염정’ 이란 시를 남긴다. 다산은 또 광주의 명산인 무등산에도 올라 기행기와 다수 시를 읊는다.

화순에서 가장 뜻 깊었던 일은 읍내 북쪽으로 2km쯤 떨어져 있는 동림사(東林寺)에서 둘째형과 함께 독서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일은 당대의 큰 선승이자 학승이었던 연담(蓮潭) 유일(有一) 스님과의 만남이다.

유일 스님은 본디 화순출신으로, 33년 동안 산문(山門)밖을 나오지 않고 불도만 닦은 당대의 명승이었다. 유일 스님은 훗날, 다산이 강진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만나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던 혜장 스님의 스승이기도 했다. 인생의 인연이란 참으로 기이하고 오묘한 것이었다.

■ 다산실학 비판 및 ‘21C 다산학’의 새로운 모색

다산 위 세대로, 조선의 실학사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올린 이는 성호였다. 경기도 안성 출신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전북 부안 학자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2)의 ‘반계수록(磻溪隨錄)’ 학문을 이어받아 실학사상의 기틀과 체계를 세웠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산은 성호선생을 기리며 충남 아산의 봉곡사에서 ‘성호학세미나’(1795년 10월)를 열고 유용한 학문(有用之學: 實學)에 힘써 요순세상 만들자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

다산의 또 다른 호 사암(俟菴)은 ‘후세의 지기(知己)를 기다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의 경학(經學) 저술은 청대 초엽까지의 훈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이에 더한 탈(脫)성리학적, 독창적인 의(義)와 리(理) 학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런 일은 다산경학의 학문구조가 아직도 일부 학자들의 의식이나 펜 끝에서 조금씩 운위되고 있을 뿐, 그의 훈고나 의리가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는 다산탄신 250주년으로 또한 유네스코 ‘2012세계기념인물’ 선정으로 뜻 깊은 행사가 많았지만, 선생이 가신지 17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다산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경서(經書)의 해석본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저 송구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난 20세기 100년간은 유학의 침체기였다. 21세기 들어 천박한 황금만능의 사조로부터 탈출할 유력한 대안이자 유일기재의 하나로서, 유학이 차츰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거기에 중국의 급부상도 한몫 거들고, 한반도를 위시한 동아시아의 역동성 또한 ‘동양사상의 고향’인 유학의 재부상 가능성을 그만큼 높이고 있다.

유학의 본질을 꿰뚫는 간명(簡明)한 이론의 확립이 요구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이론을 그 중심에 세울 것인가? 다시 다산(茶山)이 아니고, 다산학(茶山學) 이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사회 뿐 아니라, 유네스코가 앞장선 국제사회까지 나서, 개명천지의 21세기에 다시 다산을 찾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다산실학은 중국의 주자학, 양명학과 함께 대안 가운데 하나가 될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산학이 과연 중국 전통학문의 흐름에 뛰어들어 중요한 부분을 점유하고 시대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후세의 지기를 기다린다’란 뜻의 사암, 곧 다산의 기다림은 얼마나 더 지속되어야 할지 모른다.

‘21세기 다산학 연구의 새로운 모색’이 필요한 오늘이다.

글=구동수 (사)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 국제정치학 박사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