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도시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은 그리스 반도나 이탈리아 반도도 아닌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인도 및 중국 등 이른바 오리엔트 고대문명권의 도시들이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는 그 규모나 형식이 발군이었으며 그 주인공은 수메르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남쪽에 터를 잡고 있었던 수메르(Sumer)인들은 이미 B.C.6000년경부터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복합적인 도시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수많은 고대 도시들은 구약성서에도 수차례 등장할 만큼 인간의 역사와 그 궤적을 같이 하면서 오히려 당시의 유럽 본토를 미개 문명 지역으로 폄하시킬 정도로 찬란하고 조직적인 도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 지역은 습지가 많고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으로부터 발생하는 홍수나 페르시아만의 조수간만 차로 인한 피해 때문에 일찍부터 간척이나 배수 및 축제(築堤) 등 씨족이나 부족들의 협동이 필요한 토목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고대 도시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초기에는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의 도시로부터 시작하여 B.C.3000년경의 우루크 문명을 거치면서 정치, 군사, 경제 및 생활이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신전공동체 겸 초기 도시국가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들 도시는 대부분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중심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었으며 종교와 정치를 공유하면서 간혹은 상업도시로서의 기능도 수행하는 등 활발한 도시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도시 주거는 지구라트를 둘러싼 성역 외부에 밀집된 상태로 구운 진흙으로 만든 흙벽돌을 사용하는 등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우르(Ur) 같은 도시의 경우 성벽과 격자형 도로 및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건설한 도시들은 한 발 앞 선 문화적 탁월감은 물론 도로나 도시 구성 패턴 등에 있어서도 이른바 전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이른바 도시 만들기의 달인이었던 셈이다. 이 사이에 히타이트의 하투사(Hattusa)나 앗시리아 제국의 콜사바드 같은 도시들이 수메르 도시를 대신하긴 했지만 그것들 역시 수메르의 도시적 프레임을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는 점토 이외의 자원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석재나 광석 및 귀금속 등은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원격지 무역을 통해 동쪽으로는 인더스 유역,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나 이집트와도 교역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수메르의 문화와 도시 만들기가 오리엔트라는 이름의 주축으로 각지에 전파되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도시라는 것의 기본적인 속성은 인간이 모여 살면서 생활하는 곳이라고 보면 후대의 도시들이 거대하고 찬란한 도시 구조를 뽐낸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수메르 인에게 원초적인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최소한 모여 사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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