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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체험 리포트]일일 집배원 체험
사회 1일 현장체험

[현장체험 리포트]일일 집배원 체험

주소찾아 우편함 찾아 ‘진땀’…아찔한 체험후 고마움 더해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눈이 많이 오던 날 할머니 댁 근처 언덕에서 만난 아저씨 한 분이 있었다. 비료 포대를 이용해 썰매를 타는 나에게 다가와 짚을 넣어주고 잘 타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그리고는 “할머니한테 편지 왔다고 이야기하고, 썰매 조심히 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서 오토바이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20년이 지나도록 따뜻함과 고마움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는 ‘집배원 아저씨’가 바로 그 주인공.

꼬맹이 시절 삼촌처럼, 동네 아저씨처럼 다가왔던 그분 때문인지 지금도 “우체국입니다”라며 우편물을 배달해주는 집배원을 만날 때면 남 같지가 않다. 이런 우연한 인연이 나의 발길을 우체국으로 끌어당겼다. 집배원 일일체험에 나서게 된 것. 집배원 아저씨를 고마워했던 초등학생이 ‘집배원 이모’로 변신하는 그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바쁘다 바빠!’

일일 집배원이 되기 위해 찾은 수원우체국 집배실. 오전 8시도 되지 않았는데 집배실은 그야말로 사람 반, 우편물 반이었다. 처음 보는 풍경에 어리둥절하고 있는 찰나 “사모님, 거기 계시면 택배로 한 대 맞아요”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저도 집배원이에요”라는 대답에 분주하게 우편물을 나르던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됐다. 그 민망함(?)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때 마침 전날 통화했던 홍성혁 집배실장이 기자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줬다. 오늘의 근무지는 일하기가 가장 힘들다는 ‘권선구 곡반정동’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7팀에 배정돼 하루를 함께 할 정효진씨(38)를 만났다. 첫 만남은 서먹서먹했지만 7년차 베테랑인 그는 업무에 대해 자세히 알려줬다. 오늘의 첫 임무는 우편물과 작은 택배들을 번지수별로 나누는 것. 주소를 보고 나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소별로 잘 나눈 우편물을 산타할아버지가 들고 다닐법한 빨간 자루 4개에 잘 챙겨 담았다. 다행히 내 구역에는 일명 ‘똥짐(사과박스 정도 되는 크기의 택배)’이라 불리는 우편물이 없어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우편물을 엘리베이터에 싣고 지하에 도착한 순간 “우와!”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나 많은 오토바이를 한 자리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6679 번호판을 단 오토바이에 짐을 넣고 곡반정동으로 향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초보 집배원, 원룸촌에서 무너지다

곡반정동 503-1~527-5번지 하루 동안 내가 책임져야 할 구역이다. 늘 스치듯 지나갔던 이곳에 원룸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일반 우편물은 우편함에, 등기와 택배는 직접 수취인에게 전달했다. 원룸촌이라는 특징 때문인지 빈집이 3분의 2였다. “우체국입니다.” 돌아오는 반응은 “…” “그런 사람 안 사는데요.” 계단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한 것이 무색하게 주인을 만나지 못한 우편물은 상자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춥고, 다리가 아파왔다. 오토바이를 탈 줄 몰라 원룸촌을 쉼 없이 걸어다녔던 것. 오토바이를 못 탄다는 답답함 때문에 학창시절 좀 놀아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이런 잡생각도 잠시 위기를 맞닥뜨렸다. *블록 *로트? 이게 뭔가! 아직 도로명주소도 적응 못 한 새내기 집배원에게 너무나 가혹한 주소였다. 택지 개발 당시 부여됐던 블록ㆍ로트가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번지수에 도로명주소까지 총 3개 형식의 주소가 한꺼번에 사용되면서 집배 작업이 더욱 어려워졌다.

여기에 주소를 쓰다 만 반토막 주소 우편물까지 발견되면서 그야말로 멘붕(멘탈붕괴)이 왔다. 정씨는 내공이 쌓여 “그거 저 집 거예요”하며 주소가 제대로 적혀 있지도 않은 우편물을 정확하게 배달했지만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편물 보내기 전 ‘주소 확인필수’라는 말을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전하고 싶어진 순간이다.

또 주소가 있더라도 가건물인 경우에는 우편함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아 등기도 아닌 우편물을 직접 배달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3분이면 끝날 일이 15분이나 걸렸다. 점점 다리 힘도 풀려 갔다.

우체국을 나선 지 4시간여가 지났을까. 점심시간이다. 사실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곡반정동 구역 집배원 6명이 함께 식사를 한다고 했다. 정씨와 나는 배달지와 정반대 방향인 밥집으로 향했다. 끼니는 5천원에 해결해야 했다. 점심식비 지원이 5천원 밖에 되지 않았던 것. 멀리까지 이동해서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밥을 먹는 동안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갓 한 달 된 신입 집배원부터 10년이 다 돼가는 능력자까지 고통과 보람이라는 양면성을 모두 갖고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집배원이 왜 힘든지,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왜 점점 줄어드는지 십분 깨닫게 됐다. 

■아파트 우편배달은 양반이더라

점심 식사 이후 쉬는 시간도 없이 원룸촌 배달을 후다닥 마치고 옆 동네인 아이파크시티 3단지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는 동별로 들어가 우편물을 한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따뜻해서 좋았다는 말이 내 진심인 것 같다.

15개 동을 정씨와 함께 순서대로 돌았다.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어 정씨는 등기와 택배를 전달하러 각 가정으로, 나는 1층 우편함에서 호수별로 우편물을 꽂았다. 설이 다가오긴 했나 보다. 각 식품사, 홈쇼핑, 대형마트 등에서 보낸 설 선물 판매와 관련된 카탈로그가 무척 많았다. 다음 주가 되면 우편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 집배실에 발 디딜 틈이 없다는 말을 일주일 먼저 실감할 수 있었다.

원룸촌보다 일은 백배, 천배 쉬웠지만 말 못 할 고통도 있었다. 급했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점심시간 때 상가 건물, 주민센터를 이용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차마 갈 수가 없었다. 일일 사수였던 정씨가 화장실을 가는 걸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이다.

온종일 밖에서 일하는 집배원들의 생리현상 해결도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던가. 난 참을 인을 3천번쯤 그리며 바지에 실례하는 실수를 막았다.

그렇게 위태했던, 아찔했던 집배 업무가 드디어 끝났다. 작별 인사를 하는 마지막 순간 하루 동안 정든 집배원들과의 헤어짐이, 씨름을 했던 우편물과의 헤어짐이 못내 시원섭섭했다. 그렇게 일일 ‘집배원 이모’의 하루도 막을 내렸다.

사실 기자라는 본업으로 돌아온 다음 날 등이 가려워도 긁을 수가 없었다. 우편물을 들고 있었던 왼쪽 팔에 알이 배겨 팔이 올라가지 않았던 것. 하루 일한 게 이 정도인데 주말 근무는 물론 여름 휴가마저도 가기 어려운 집배원들의 몸 상태는 오죽할까.

스마트폰이 있어서, 휴대전화가 있어서 줄었으리라 생각했던 우편물은 여전히 많았다. 역시나 기계가 사람의 자리를 전부를 대신하지 못했다. 소식을 가득 담은 그들의 오토바이는 눈이 오는 오늘도, 비가 오는 내일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모레도 우편물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거침없이 달려간다.

우편물을 받았을 때 마음을 전달하는 다리가 돼 준 집배원들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전할 줄 아는 이들이 많아지길 간절히 바라본다.

장혜준 기자 wshj222@kyeonggi.com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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