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10시 서울 프레스 센터 국회 회의장. 대법원장을 초청한 생방송 토론회다. “경기고법 설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무 소극적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답변이 길었다. “(경기)고법이 필요하다. 경기도의 사건 수도 그렇고 서울고법은 한계에 왔다. …중요한 것은 돈이다. 부지만 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데 기재부에서 받아내야 한다…이런 복잡한 문제 때문에 소극적인 것으로 비치는 것이다.”
예상했던 답변에 살만 몇 점 붙었다. 어차피 답변보다는 질문에 비중을 둔 준비였다. 편집 안 되는 생방송에서 경기도민의 입장이나 왕창 쏟아 붓겠다는 욕심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수확이 오찬장에서 생겼다. 설렁탕이 놓인 원탁 좌우로 A와 B가 다가와 앉았다. A는 법원행정처 고위 관계자, B는 대법원 핵심 관계자다. 둘 다 경기고법 설치에 직접적인 업무 책임자다. 경기고법 질문자와 경기고법 책임자들간의 오찬이다.
B가 말했다. “경기도가 고법 부지를 무상으로 준다는 건 아니잖아요.” 경기도의 ‘고법 부지 제공 계획’에 대한 얘기다. 무상인지 유상인지까지 정확히 말하고 있다. 이미 이 조건에 대한 검토가 이뤄졌다는 얘기다. 이어 이런 말을 덧붙인다. “사실은 우리가 지켜보는 땅이 있습니다. 수원시 영통구에 있는 땅 4천평입니다. 현재 기재부 소유입니다. 어차피 국가 소유니까 그게 쉬울텐데…”. 이게 무슨 얘긴가. 도청사 부지도 아니고 농생대 이전 부지도 아니다.
대법원의 비협조? 근거 없어
이어지는 얘기는 A가 했다. “고법 설치에 지금 필요한 건 국회의원입니다. 수원엔 김진표 의원도 있고, 남경필 의원도 있잖아요. 그분들이 좀 나서주면 좋을 텐데요.” 법원의 신설에는 개개의 법률이 필요하다. 법안 통과는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법 통과를 위해서는 탄원서 수만 장보다 국회의원 한둘의 힘이 더 필요하다. A는 그 일의 적격자로 부총리 출신 김진표 의원과 집권당 다선인 남경필 의원을 꼽았다.
B가 다시 거들었다. “남양주 지원 신설 때는 정말 편했습니다. 최재성 의원이 모든 걸 풀어갔습니다. 저는 최 의원이 자료 달라면 자료 주고 서류 만들라면 서류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남양주 법원(지원)이 확정됐다. 역시 법률을 만들고 예산을 챙겨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8개월여 만에 끝났다. B는 “최재성 의원이 (기재부 공무원을) 일일이 설득하고 다녔답니다”라며 비담(秘談)까지 소개했다.
1시간여의 오찬은 B의 귀엣말로 마무리됐다. “기재부 땅이든 예산 요청이든 우리 입으로 말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수원에) 내려가면 (경기일보 가)도와주십시오. 필요한 것 있으면 도 와드리겠습니다.”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대법원 때문에 안 되고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 ‘경기고법 설치에 대법원이 비협조적이다. 그러니 범도민 대책위를 만들어 대법원을 압박해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고개 하나 너머 대법원이 가 있는 수순은 그 너머였다. 예산 확보와 법안 통과를 위한 수(手)에까지 가 있었다. 대법원을 밀어붙이자며 세(勢)에 몰두하는 ‘수원’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문장의 흐름을 위해 실체적 진실을 과장할 생각은 없다. 대법원이 말하는 의지에도 의심 가는 구석은 있고, ‘수원’이 취하는 방식에도 이해 가는 부분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양쪽 모두에서 같은 해석이 나와야 하는 공통의 조건은 있다. 고법 설치의 절차가 법률통과를 앞두고 있고, 예산확보를 위해 기재부를 움직여야 한다는 현실이다. 이 현실만은 달리 해석되면 안 된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그 대책을 얘기하고 있고, ‘수원’은 대법원 압박만 얘기하고 있다.
고법 票 장사, 이제 그만해야
진단이 엉뚱하면 방향도 엉뚱해 지는 법, 지금의 ‘수원’이 그렇다. 대법원이 기재부 좀 압박해달라는데 ‘수원’은 대법원을 압박하고 있고, 대법원이 국회의원 두세 명의 힘이 필요하다는데 ‘수원’은 도민 1천만 명의 연판장을 계획하고 있고, 대법원이 당장에 쓸 수 있는 땅 영통구 4천평에 공들이는데 ‘수원’은 무상(無償)도 아닌 도청사 부지를 두고 되느니 안 되느니 논쟁을 벌인다. 몰라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이러는 걸까? 혹시 고법 깃발만 쳐들어도 조건 없이 벌어지는 유권자들의 광기 어린 춤판에 재미붙여서 이러는 건 아닐까?
그날 깍듯한 예의 뒤로 숨겨진 A와 B의 눈빛은 분명히 질문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바보야, 중요한 건 돈이고 법이야. 사람 모아놓고 현수막 내걸 때가 아니야.’
[이슈&토크 참여하기 = 대법원 “경기고법 부지로 영통구 4천평이…”]
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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