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생명의 위대함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누리고 있는 생명은 어떤 경우라도 절대적입니다. 더구나 신앙인은 이 생명이 절대자이신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깨달음은 석존이 사자후로서 하신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제가 감히 불교의 가르침을 넘나보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이 말씀은 존재의 존귀함 즉, 존재의 본질이 영원하고 무한하고 완성적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에서도 ‘인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입법부 또는 지상의 어떤 정부도 하느님께서 주신 권리들에 대해 어떤 수정 또는 변경할 수 있는 권리나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종교도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오 16장 26절)”라고 인간의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예수님께서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 생명의 존귀함은 절대적인 것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산하 특별위원회가 최근 마련한 ‘무의미한 연명의 의료결정에 관한 권고안 초안’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공청회가 며칠 전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가톨릭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제도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윤리적 의미와 비전을 바라보는가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바탕으로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환자의 질병의 정도가 즉 ‘임종기’에 있는 것에만 국한되도록 한다는 것이면서도 여러 환자의 경우를 보면 천차만별이라서 때로는 무리수를 두는 경우를 임상에서 자주 겪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법제도화보다 꼭 선행되어야 할 것이 병원 내의 윤리위원회를 활성화하여 환자의 생명의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까다로운 사안에 대해 숙고함으로써 의료의 윤리성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가톨릭 병원엔 들어오는 정문에 ‘치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라고 크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중앙 의료원은 ‘죽음을 맞는 이들이 하느님나라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인간다운 품위를 돕는다’라는 이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 인간의 생명에 대해 아무리 의술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이를 인위적으로 제도를 만들어서 ‘무의미한 연명의 결정’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잘못하면 생명의 극에까지 의료진이 개입한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문에도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합니다. 지상(至上)이란 더 없이란 말로도 표현합니다. 영어로는 most of all이나 supremely 혹은 utmost respect로도 표현합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김홍섭 판사의 일화는 우리를 감동시키고도 남습니다. 김 판사가 1961년 피고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나와 피고인 어느 쪽이 죄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해 당신을 단죄하는 것이니 이해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피고인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들고 찾아가곤 했는가 하면 사형 후엔 그가 묻혀 있는 무덤을 자주 찾아가서 기도를 했다고도 합니다.

‘무의미한 연명의 결정’ 윤리성 중요

우리는 여기서 인간인 의료진의 한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소설 동의보감에도 나오듯이 우리는 이런 의사들에게 나의 마지막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명의(名醫) 심의(心醫) 신의(神醫) 그리고 성의(聖醫)들이 계시다고 합니다. 심폐소생술이든 인공호흡기든 혈액투석이든 항암제 투여든 우리는 허준 같은 성의나 아니면 그의 스승 유의태 같은 신의에 맡기고 싶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의사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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