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수명 다한 대한민국미술대전 이제 폐기할 때

대한민국미술대전(이하 미술대전)은 1949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전신이지만 그 모태는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1922년부터 시작된 ‘조선미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제는 조선은 물론 대만에도 1927년 ‘대만미술전람회’(대전/부전)를, 그리고 1937년 만주에 만주국미술전람회(만전)를 개최함으로써 식민지 미술문화정책을 일단락 짓는다.

물론 이들 전람회는 1907년 일본 문부성 주최로 열린 문부성전람회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이는 이후 ‘제전(帝展/1917)’과 신문전(新文展/1937)으로 명칭을 바꿔가며 일제 패망 1년 전인 1944년까지 이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제도는 1664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미술가전(Salon des Artistes Franais)이라는 의미의 관전으로 보통 르 살롱(le Salon)이라고 일컫는 프랑스 관전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공모전의 시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르 살롱(Le Salon)조차 19세기 이후 미술전이 보수적인 경향을 고집하던 이 미전에 반발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미술사에서 공모전이라는 시스템이 얼마나 반예술적인지 방증하는 대목이다. 이 전람회에서 명성을 얻은 화가들도 오히려 ‘낙선자 미술전시회’ ‘살롱 데 자르티스트 쟁데팡당(앵데팡당전)’ ‘인상파 미술전’ 등을 무대로 활약하였던 것이다.

미술대전이 반예술적이라는 점은 우선 마치 운동경기와 같이 등위와 서열을 중시하는 시상제도와 권력적 속성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속성은 심사위원의 기호에 맞추는 비창의적 예술을 양산하게 되고, 거시적으로는 미술지망생들을 제도의 틀에 규격화시키는 장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조선미전에서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조선향토색 운운한 것은 예술의 아방가르드적이고 현실비판적인 요소를 잠재워 그들의 식민정책에 동화되는 도구로 이끌고자 한 것은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즉 주최측이 의도하는 방향에 따라 전람회가 전개되고 응모자들은 상을 받기 위하여 이 의도에 철저히 순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전 30년간 이러한 일제의 음모가 비판 없이 답습되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공모전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그것이 신인발굴이라는 시대적 선별장치로서의 임무가 수명을 다 할 경우 해체가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다.

관전이든 민전이든 우리의 공모전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우리의 국호를 사용하면서도 이미 권위를 상실한 미술대전의 경우 가장 서둘러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할 구태적 공모전의 대명사라고 볼 수 있다. 매년 수많은 예산을 사용하면서도 제대로 된 신인하나 발굴하지 못하는 과오를 매년 반복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안이하고 타성화된 공모전 방식을 답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 이 공모전에 권위가 생길 리 만무하고 기성작가들의 밥그릇 싸움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신의 문하생을 이 공모전에 얼마만큼 입선시켰는가는 그 강습소의 존폐문제와 더불어 그 작가의 생존여부가 걸린 문제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이 공모전에서 만들어진 미술은 대외적으로 전혀 통용이 되지 않는 미술이 되고, 작가 지망생들 역시 이의 경향과 요구에 맞추다 보니 시대에 뒤쳐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 공모전을 본래 취지대로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재론의 여지없이 골격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형식과 내용을 담보하고, 국제적 보편성과 지역적 특수성이 고려될 수 있도록 이 전시에 전방위적인 메스가 가해져야 할 것이다. 이제 미술대전은 해체냐 재편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이경모 미술평론가ㆍ수원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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