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아일랜드에서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판매 금지를 당했던 문제작이 국내 초역 발간됐다. 미국 작가 돈리비(1926~)의 ‘진저맨’(작가정신 刊)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1955년 프랑스에서 처음 발간되면서 문제작으로 떠올랐다. 전후의 불안과 허무에서 탄생한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나 ‘달려라 토끼’의 래빗과는 또 다른 주인공 때문이다.
‘생강색 머리의 남자’라는 뜻의 진저맨 속 주인공은 시배스천 데이저필드. 상스럽고, 우스꽝스럽고, 반영웅적 인물이다. 그를 쫓다보면 신성 모독적이고, 음란하며, 당혹스러운 언어와 행동을 목격하게 된다.
스물일곱 살의 청년 시배스천 데인저필드는 법대생으로 아내와 딸과 살지만, 가정에는 무신경하다. 오직 술과 여자가 주는 쾌락에만 빠져 있다.
생활고를 푸념하는 아내에게 성서 구절을 변용해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탁 생기고, 전기가 있으라 하면 전기가 있다”고 응수하는 것은 기본이다. 가난한 친구에게 술값을 털어내고, 거리낌없이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하고, 법의 사각지대로 제대로 달아날 방법을 궁리한다.
“진정한 선을 알기 위해서는 악당이 되어 죄를 지어봐야 해요. 어린애가 순결하게 태어나서 순결하게 살다가 순결하게 죽는 게 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아니, 바닥까지 내려가세요. 바닥까지. 극단적인 하얀색은 오히려 검은색을 띠게 마련이에요. 고결하고 정의로운 체하는 자들은 어차피 비열한 무리였어요.”
누구에게나 욕 먹을 수 밖에 없는 삶을 사는 주인공은 그렇다고 진정한 자유나 부를 갈구하지도 않는다. 그냥 산다.
고삐 풀린 망아지같이 거칠고 방종한 행동 이면에는 존재에 대한 고뇌와 비애감이 흐른다. 전후 시대의 허무와 불안의 그림자가 빚은 인물인 것이다.
전후를 오롯이 겪어내야 했던 한 개인으로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찰나의 쾌락뿐이었던 청춘. 기존 체제에 대한 적대감이나 자조적 허무감이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나약한 인간. 1950년대 미국식 자유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 등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인물.
그것은 삶에 지쳐 무기력하고 흐리멍텅해져버린 이 시대 자화상의 한 단편과 닮아 있다. 때문에 주인공이 읊조리는 자조적인 혼잣말은 시대의 경종을 울린다.
“나는 영원히 내리막길을 걸어서 밑바닥에 머무를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이 사회 구조 전체가 나를 가난 속에 묶어두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그런데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 돈을 얻으려고 똥구멍이 찢어지게 일해야 했어. 머리를 쓰는 것도 노동이야.” 값 1만4천800원.
류설아기자 rsa119@kyeonggi.com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