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요한 8장 32절 참조) 먼저 진리를 깨우치도록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중에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9장 37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진리란 개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겐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행위 안에서 터득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여러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만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추구하는 ‘자유’라는 개념과 현세적인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는 많은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사랑의 기술’이란 책을 써서 세계인에게 공감대를 형성했던 유태계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현대인들은 정치 경제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또 다른 장벽들 즉 고독과 무력감이 자신을 휩싸기 시작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독과 무력감인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사랑과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일을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해 나갈 때 삶의 의미 ‘자유’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현대 정보산업이 자유로운 행복의 세계를 향한 여러 방법을 개척하고 있지만 개체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에 완전히 갇혀 지내다 보니 예기치 않은 답답함과 절망이 우리를 휘감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출구 없는 장 안에 갇힌 신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와 해탈의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왜 도덕인가?’에서 인간 사회가 아무리 약육강식의 환경이라 하더라도 도덕이 중요시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좀 변질이 되더라도 그 가치는 엄연히 존재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지만 결국 도덕이라는 틀 안에서 자유를 찾아야 함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구원(자유)을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말씀하십니다.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진리가 거기에 있음을 보는데 바로 이것이 사랑과 용서 그리고 평등한 사회의 구현입니다.
불란서의 고생물학자요 진화론을 그리스도 종교차원에서 예리하게 제시한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hard de Chardin) 신부는 예수님을 우리 인간의 진화의 최종 목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오메가 점이라고 합니다. 즉 세상의 모든 존재가 결국 예수님께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예수님과 합일하기 위해서는 진화의 기본 에너지인 사랑이 전제됨을 강력하게 제시합니다.
사랑과 용서ㆍ평등한 사회가 해답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의 모습입니다. 불교에서도 해탈의 경지를 무아의 경지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합일하기 위해서는 기본에너지인 사랑을 전제로 하는데 그 구성요소는 바로 용서와 평등한 사회구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을 향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최재용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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