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의 도시 이야기] 중국 문명 최초의 도시, 은허(殷墟)

고대 중국 문명은 서양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황허라는 강을 끼고 발생했다. 황허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신석기문화는 초기에는 허난성의 페이리강(裴李崗)문화와 허베이성(河北省)의 츠산(磁山)문화, 후기에는 BC 4000년 경의 양사오(仰韶)문화와 그로부터 발전한 룽산(龍山)문화가 그 뒤를 이었다. 이 기간 동안 황허강의 중 하류 지방에는 수많은 농경취락이 밀집됐고 그 규모도 점차 커졌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신석기라 해도 청동으로 무장한 세력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신석기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른바 왕조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이 때부터 중국도 본격적인 고대도시의 시기로 접어들게 됐다. 하(夏), 상(商), 주(周) 3대의 왕조가 중국을 지배하였다고는 하나 역사적인 실재가 증명된 최초의 국가는 상(商)나라였다.

상나라는 전기(B.C. 1600년-1300)와 도읍을 은으로 바꾼 후기(B.C. 1300-1046년)에 이르기까지 550여 년 동안 화북(華北)지역에 군림한 최초의 왕조이자 도시국가였다.

이때부터 255년 동안 8세대 12명의 왕들이 통치하며 상나라는 청동기 시대의 전성기를 누렸고 은이라는 도시는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은의 유적지인 은허(殷墟)에서 80여 채 이상의 궁전이나 신전 터 및 무덤 등이 발견돼 이미 고대국가로서의 면모가 확인된 바 있으며 나아가 종묘나 제왕, 왕족 등은 지상 주거에, 백성들은 수혈주거에 거주하는 등 사회적 신분에 따른 계급화도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거북이 껍데기나 소나 양의 뼈에 문자나 표식을 새긴 이른바 갑골문자는 상나라가 국가의 중요한 일을 정할 때 신에게 묻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제정일치 혹은 신권정치 사회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은력이라는 달력의 존재는 당시 농경이 활발하고 체계적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상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것은 수레와 마차로 대변되는 전투 병기의 존재였다. 거마갱(車馬坑) 같은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마차와 순장된 말의 숫자는 상나라가 대규모의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국가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마차를 이용했다는 것은 기동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방증하는 셈이니 당시 상나라가 군사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수준이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마차에 사용되는 수레바퀴의 발명이었다.

그러나 수레바퀴처럼 역사도 돌고 도는 것일까. 기원전 1046년경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패하면서 도시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은허(殷墟)가 된 셈이다. 말희라는 여인을 사랑한 하나라의 걸왕(桀王)의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철퇴를 가한 탕왕이 의기투합해 세운 상나라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달기를 총애한 주왕의 또 다른 주지육림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간 것이다. 어찌 보면 수레바퀴 같은 윤회이자 업보의 시작이었다.

김영훈 대진대 건축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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