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하루 중 어느 시간을 정해서 매일같이 그 하루치의 우편물들을 찬찬히 살피고 있다. 대개는 전시도록들이다. 그렇게 도록이 쌓이면 순간 납작한 책상은 세상과 만나는 곳이자 세상에 말을 건네는 장소가 된다.
그렇게 쌓인 도록 중에서 가보아야 할 전시를 챙기고 보관해야 할 자료를 분류하고 그 외의 것들은 아쉽지만 버린다. 많은 시간을 이렇게 도록을 보고 봐야할 전시를 결정하고 그런 다음 특정한 날을 정해서 전시장을 순례하면서 보낸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무수한 작가를 만났고 만나고 있다. 그것도 깊은 인연이라 나는 그 소중한 만남을 망막과 기억에 깊숙이 안고 있다. 얼굴은 흐릿해져도, 이름은 가물 해도 한 번 본 그 작품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 작품들을 보러 다니면서 그들이 지닌 미술에의 욕망을 만나고 미술에 대한 생각의 편린을 접했으며 그것과 함께 살고 있는 그들의 육신을 보았다. 그런 삶을 경험했다. 작가들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은 타고난 미술에의 재능이나 열정을 가능한 한 지속해서 자기 생애의 명분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외부의 목소리에 끌려 산다면 예술가들은 자기 내부의 목소리와 요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들이다.
작가들은 ‘좋은 작품’ 혹은 ‘예술’이란 화두 하나를 붙들고 그것을 통해 인정받고자, 삶의 보상을 받고자 노력하는 이들이다. 대부분 그 길에 가닿지 못하고 죽거나 재능이 미치지 못함에 절망하거나 혹은 위선적인 작업으로 덮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일지언정 그 욕망만큼은 참으로 질기고 강하다. 도대체 왜 그들은 그렇게 작업을 하고자 할까? 예술 역시 삶처럼 모호하고 난감한 대상이다. 작업을 한다는 것 또한 난해한 일에 다름 아니다.
좋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 전정한 작가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운이 좋게도 나는 좋은 작가들을 비교적 많이 만난 편이다. 좋은 작가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준에 입각해서 말이다. 그들은 나이를 떠나 내게 스승이 된 존재들이다.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놀라운 눈을 일러주었는가 하면 미술에 대한 확장된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자기 삶의 시간들을 온전히 투여해서 일에 몰두하는 집요함, 그리고 가난과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홀로 가는 무서운 마음들을 심어주었다.
세상의 변방에서, 경계에서 외롭게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들의 시린 몸을 새삼 떠올려 본다. 언젠가 한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갔었다. 아파트 지하에 마련된 좁고 긴 방이었는데 주변은 온통 깜깜했다. 내부에는 작은 책상 하나.
이젤, 캔버스 몇 개와 흩어진 그림도구, 시집 몇 권, 조그만 카세트라디오가 전부였다. 작업실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하고 적조하며 소박했다. 이토록 단출한 살림과 햇빛 한 뼘 들지 않는 곳에서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는 그 작가의 이젤에는 작은 포스트 잇 하나가 반창고처럼 붙어있었다. 나는 우연히 그 작은 종이에 적힌 문구를 보고 잠시 동안 망연했다.
지상으로 나와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자꾸만 그 문구들이 떠올랐다. 십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삶은 단순하고 명료해야 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 역시 그렇게 단순한 삶에서 가능할 것이다. 어떠한 보상도, 과도한 욕망도 지우고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며 끝까지 가겠다는 것이 좋은 작가들의 공통된 태도였다.
그것을 선연하게 보여주었던 그 포스트 잇에 작은 글자로 쓰여진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림을 사랑할 것. 그림 앞에 오래 앉아 있을 것” 그 말 이 외에 다른 어떤 말이 필요할까? 이 계절에 나 또한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일에 몰입해 끝까지 가고 싶다. 저물고 싶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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