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한운성의 ‘서양 배와 복숭아’

한가위가 코앞이다. 이번 한가위 연휴는 길어서 고향을 다녀오기에 충분하지 않나 싶다. 날마다 달이 차는 모습을 보면서 한가위의 풍요를 생각한다. 여름 내내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처서가 지난 뒤의 달은 맑고 투명했다. 그 만큼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증좌다.

새벽이슬이 차니 가을 과일들이 무르익을 것이다. 푸른 감 푸른 사과가 붉은 홍시와 홍옥(紅玉)으로 익어서 단내를 풍길 것이고, 밤과 대추도 씨알이 굵게 영글 것이다. 이렇듯 과일이 익는 것은 한 해의 시간이 절정을 향해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운성 작가는 오랫동안 과일의 형상과 색과 의미를 따져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사뭇 단순하여 여러 가지 과일들의 풋풋한 초상을 보는 듯하다. 토마토의 인상은 토마토에 기울고 호박의 인상은 호박에 기울 듯이, 각각의 과일은 그 과일이 가진 모양과 색에 따라 기운다. 복숭아의 설핏 감도는 붉은 홍조와 노란 살내음의 색채를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과일마다의 모양과 색과 향에 매료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초상화를 깊게 연구한 조선미 선생은 초상화만이 갖는 독특한 미학을 ‘형(形)과 영(影)의 예술’로 밝힌 바 있다. 이때 형은 형상(形象)으로서 그려야 할 인물을 말한다면, 영은 그려진 초상화다. 화가는 초상화를 표현함에 있어 인물을 극진하게 묘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형상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형상의 배후에는 그 사람만이 가진 불변의 본질로서 정신(神)이나 마음(心)이 있고, 화가는 그 정신과 마음을 초상화에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과일의 형상을 사람의 형상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그 이치가 다르나, 한운성의 과일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둘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어떤 사물이 처한 형국에 집중했다. 예컨대 매듭 같은 것이 그것인데, 그는 그런 이미지를 표현할 때조차도 사물의 정신을 보고자 했다. 그러니 과일그림을 ‘정물화’의 차원에서만 보는 것은 그의 본뜻과 배치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 ‘서양 배와 복숭아’를 가만히, 아주 천천히 살펴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물론 서양 배와 잘 익은 복숭아가 보일 것이다. 그 다음은? 한 입 상큼하게 먹고 싶다면 당신은 벌써 저 그림의 향에 취한 것이다. 그것이 그림의 정신이요, 마음이다.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