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 소설집 ‘별명의 달인’

드디어 가을이다. 이상기온으로 짧아진 가을, 그래서 더 아쉬울 계절이다. 여유를 만끽하며 즐겼던 ‘독서의 계절’이라는 타이틀마저 내려놓아야 할 지경이다. 머뭇거리지 말고 책으로 손을 뻗자. 때마침 우리나라 대표 전업작가 구효서의 따끈따끈한 신간 소설집이 나왔다. 올해로 등단 26년을 맞은 작가의 농익은 깊이와 유머가 버무려져 쉽게 읽으며 사색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으로 주목된다.

삶이 깊어갈수록 소설세계 또한 다채로워진 구효서(56)의 신작 ‘별명의 달인’(문학동네 刊)은 8편의 단편소설을 담았다. 다양한 삶을 꾸려가는 화자를 내세워 우리네 이웃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시계가 걸렸던 자리’(창비 刊)와 ‘저녁이 아름다운 집’(랜덤하우스코리아 刊)을 잇는 이번 소설집은 작가가 천착해 온 탄생과 소멸의 문제에서 벗어나, 삶 그 자체를 조망한다.

표제작의 화자는 학창 시절 자신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었던 친구 ‘별명의 달인’을 찾아간다. “당신은 제대로 아는 게 없어”라고 말하던 아내가 갑자기 떠난 뒤다.

주위 사람의 특징을 잘 찾아내 ‘별명의 달인’으로 꼽힌 옛 친구라면 아내의 말 뜻을 알고 자신에게 무엇인가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하지만 그를 만나 지난날을 회상하던 화자는 옛 친구에게 별명 짓기는 재미가 아닌 공포와 고통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음을 깨닫는다. 타인에 대한 빈틈없는 파악이 불가능한 데서 오는 두려움을 발견한 것이다. 

구효서는 표제작의 화자와 별명의 달인 간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과 관계 맺으며 자기만의 틀로 상대를 규정하는 우리를 꼬집는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영점에 서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옛집에 있던 책 한 권에 대해 형제들이 제각각 다르게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록작 ‘모란꽃’의 화자는 자신의 기억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어가며 “책은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인 셈이었고, 내용을 조금씩 달리 알고 있다 해도 그것 모두 모란꽃이었음”을 깨닫는다.

작가는 불변의 원본은 없으며 서로 다른 기억의 판본이 각각의 삶의 본질임을 전한다.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온 메일들을 제목만 읽고 지워버리는 ‘화양연화’의 남자, 병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형과 지체장애자 동생과의 소통을 ‘그린 6431-워딩.hwp’, 애증의 관계이던 남편과 아끼던 딸을 잃고 가슴속이 텅 비어버린 여자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쫓는 ‘저 좀 봐줘요’ 등 작가 특유의 절제된 감정와 정갈한 문체로 엮여 있다. 값 1만2000원

류설아기자 rsa11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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