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매일같이 오르는 보배로운 마음의 산이 있다. 바로 정조라는 산이고 실학 사상가들이라는 봉우리다.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리라는 꿈이 무한히 깃든 정조라는 마음의 산이다. 그 산에는 뛰어난 봉우리들이 또한 많다. 아! 우리 반계의 봉우리며 성호, 다산의 봉우리다. 그리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위민, 개혁, 예술, 융합, 효심의 봉우리들이다.
나는 매일매일 새벽 아침에 조용히 나무 밑 의자에 앉아 정조의 산으로 마음의 산행을 하고 있다. 많은 봉우리 중에 반계 유형원의 봉우리를 최근에는 가장 즐겨 찾는다. 오를 때마다 큰 감동과 희망을 얻기 때문이다. 반계(1622~1673)는 젊은 시절 여러 가지 정치적 사정으로 전북 부안 우만동으로 내려가서 반계 서당을 짓고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경기도에 잠든 정조와 삼대 실학가들
백성의 삶을 깊이 살펴봤고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방향과 방안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31세부터 49세까지 여지지를 비롯한 이기총론 등의 내용을 묶은 것이 필생의 역작인 ‘반계수록’이라는 저술이다. 반계는 19년의 세월을 바쳐 개혁사상과 이상 국가 건설을 구상했다.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땅을 균등하게 분배하고 양반·상민 구분 없이 균등하게 세금을 부과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어떤 인연인지 나도 20여 년 전에 부안 월명암 사성선원에서 열심히 참선 정진하고 있었다. 여름 한 철 공부가 끝나고 해제가 다가올 무렵 시간을 내어 부안의 여러 명소를 둘러봤고 반계의 서당을 찾아봤었다. 저 멀리 앞에 있는 산 아래 중턱쯤에 스스로의 뜻으로 집 하나가 서 있었다. 바로 반계 서당이었다. 그때에도 나는 마음 깊이 반계의 앞선 외로운 뜻을 접했었다.
반계는 특히 수원화성의 건설을 최초로 구상했다. “팔달산 들판에 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쌓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이후 10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반계수록을 읽고 나니 나에게 있어서 반계는 아침저녁으로 만난 사람과 같다.”
반계는 조선 중·후기에 경기도가 낳은 큰 인물이며 시대를 앞선 실학 사상가들의 비조였다. 나는 지금 선방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묵연히 사유해 본다. 나도 십수 년 동안 전국의 선원에서 참선 정진하며 부처님의 불성 평등의 가르침을 체득해가며 나의 참 주인공을 찾아 정진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남김없이 해탈의 생명이 되기를 기원하고 또 발원했다. 나와 반계의 마음은 무엇으로 하나라고 할 것인가? 나와 반계의 마음은 무엇으로 다르다고 할 것인가?
뜨거운 정열로 모인 성호 학파의 사상가들, 부민 강국을 위해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다산의 꿈과 외침이 가득한 이 정조의 산에 이제는 많은 이들이 함께 산책했으면 좋겠다.
대립과 분열 넘어 함께 사유의 산책을
각계각층의 대립과 분열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문화복지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해 반계의 봉우리를 오르는 이 사유의 산책을 우리 모두 함께 해가자. 기이하게도 정조와 삼대 실학사상가들이 지금 우리 경기도에 꼭 이루어야 할 꿈을 안고 잠들어 있다. 정조는 화성에, 반계는 용인에, 성호는 안산에, 다산은 남양주에….
우리 정조의 후예들은 이제, 찬란했던 18세기의 큰 위인들의 꿈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우리 경기도가 나라발전을 위한 크고 앞선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우리 정조의 후예들이 모두 다 스스로 귀하고 훌륭한 이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인해 스님 용주사 문화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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