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칼럼] 30년 前 책, 그 속에서 내란죄는…

김종구 논설실장 kimjg@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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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벌레까지 기어 나왔다. 종이는 누렇다 못해 노랗게 변했다. 볼펜으로 그어졌던 밑줄이 번져 곳곳이 퍼렜다. 뒷장에 써놓은 ‘학번 842088’이란 글씨도 왠지 낯설다. 발행일 1983년 12월 15일, 저자 진계호, 책 제목 ‘형법각론’. 30년 전 어느 날 구입해 3~4년 정도 보다가 덮었던 책이다. 참으로 긴 세월을 용케도 꽂혀 있었다. 이석기 의원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펴보지도 못할 뻔했다.

하필 책 속 ‘내란죄’ 부분이 깨끗했다. 문제 뽑기에 운(運)을 걸던 얍삽한 학창 시절이 남긴 쑥스런 결과다. 유독 순수 법학을 강조하던 지도교수-장영민 박사-의 영향도 있었다. 내란죄를 법학의 영역 밖으로 취급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기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년)에서 이어진 저항이 캠퍼스를 뒤덮던 때다. ‘내란죄’ 학습은 강의실이 아닌 ‘최루탄’속에서 이뤄졌다. 그랬던 그 부분을 다시 읽었다. 노트 위에 빼곡히 정리까지 했다. 답안지를 제출한다는 심정이었다.

곧 시작될 법률 전쟁

Ⅰ. 의의: 내란의 죄란 국가조직의 기본 제도를 다중의 폭력에 의하여 불법으로 파괴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범죄다. 국토참절ㆍ국헌문란의 목적으로 다중이 결합하여 폭행ㆍ협박하는 집합범이다. 다수인이 어느 정도 조직화되어 있음을 요한다. Ⅱ. 특성: 내란죄는 혁명의 성공 여부에 따라 내란죄에 관한 형법규정의 적용문제가 달라지게 된다. 여기에 형법의 극한에 위치하는 본 죄의 특성이 있다.

이때 ‘국가 존립’은 1차적으로는 정치문제이고 2차적으로만 형법상의 문제가 될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Ⅲ. 특별법과의 관계: 내란죄와 국가보안법이 충돌할 때에는 특별법(국가보안법)이 우선 적용된다. 즉,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반국가단체에 가입하는 행위는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처벌되고, 그 행위가 폭동으로까지 나아갈 때에는 내란죄의 적용을 받는다.

Ⅳ. 주체 및 행위: 주체에는 하등의 제한이 없으나 다중범의 성질상 폭행ㆍ협박이 적어도 한 지방의 평온을 문란케 할 정도의 ‘상당수’에 달할 것임을 요한다. 행위는 상해ㆍ강도ㆍ방화ㆍ건조물파괴 등 내란을 달성함에 필요한 일체의 방법을 포함한다.

Ⅴ. 예비와 음모: ‘내란 예비’는 내란의 실행을 목적으로 병기ㆍ자금을 조달하거나 군중을 집회하게 하는 것 등의 물질적 준비행위다. ‘내란음모’는 내란을 일으킬 계획하에서 2인 이상이 상호협의하는 것이다. 여기엔 내란을 범할 목적이 있어야 한다.

Ⅵ. 처벌: 내란죄는 사형, 무기 징역 또는 무기 금고에 처한다. 내란 예비ㆍ음모죄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나 유기 금고에 처한다. 단, 예비ㆍ음모는 자수자의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이는 내란이라는 중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정책적 규정이다. 그 시절에도 B 학점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형법이다. 답안지랄 것도 없는 졸문(拙文)임에 틀림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끼적거려 놓고 가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내란죄 토론장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시작은 이미 됐다. ‘내란죄가 된다더라’는 기사도 있고, ‘내란죄가 안 된다더라’는 기사도 있다. 아직은 학자들의 실명이 인용되는 ‘예의 바른’ 형식이다. 하지만 이 예의는 기소(起訴) 전까지만이다. 이후의 예상은 난타전이다. 각자에 유리하게 각색된 주장들이 학설의 탈을 쓰고 인터넷을 누빌 것이다. 보수라 불리는 만인과 종북이라 불리는 만인이 그 중심에서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다.

한쪽의 괴멸 부를 것

그 때를 대비해 적어 놓는 것이다. 사견(私見)도 빼고 판단(判斷)도 뺀, 있는 그대로의 교과서적 정의를 옮겨 놓는 것이다. 참고로 삼은 책은 30년이나 된 고서(古書)다. 하지만 죄목이 내란죄라서 괜찮을 듯싶다. 어차피 그 30년간 내란죄는 없었다. 내란죄가 없었으니 판례(判例)도 없었다. 판례가 없었으니 학설(學說)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30년만에 터진 그 때의 음모 사건을 올려놓을 저울은 어차피 30년 전 내란 학설뿐이다.

‘이석기=내란 주체’ ‘RO=내란 조직’ ‘비밀회합=내란 음모’. 이 등식을 두고 ‘연결하려는 쪽’과 ‘끊어내려는 쪽’이 이제 막-기소와 동시에-전쟁에 나서려 한다. 양쪽 모두 학문적 논쟁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어느 한 쪽은 현실적 괴멸을 맞아야만 하는 그런 냉험한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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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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