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붓끝따라 ‘마을이야기’가 벽화로… 칙칙했던 담벼락에 이야기꽃 피었네
하지만 점차 벽화 사업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전문성 때문에 화가 주도로 그려진 벽화는 프로젝트 기간 만료 후 보존 관리가 쉽지 않고, 서투른 실력의 주민이 그렸을 경우 완성도가 떨어져 오히려 흉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각 마을의 정체성이나 차별성을 담지 않은 채 천편일률적인 이미지의 벽화는 쉽게 질리고 결국 주민과 관광객으로부터 외면받는 것도 문제다.
이 같은 문제를 적극 해결한 벽화단이 등장했다. 안성문화원(원장 양장평)이 3년째 역점사업으로 추진, 운영하는 ‘실버벽화사업단’이 그 주인공이다.
실버벽화사업단은 올해로 3년째 운영되고 있다. 안성문화원이 제 2의 인생을 맞은 노인층에게 대외활동 동기와 문화활동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정신적 풍요와 일자리 창출을 동시에 꾀한다는 목적으로 기획한 사업이다.
55세 이상 어르신 20여 명으로 구성, 최고령자 70세 회원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5월부터 최근까지 학교 담벼락과 노후된 건물, 공사장 차단벽 등 안성시 곳곳에 그림을 그려왔다.
매 벽화 작업에는 안성에서 작업하는 전업작가이자 실버벽화사업단의 지도강사인 강종찬(54)씨를 비롯해 미술 부문 전문가와 자원봉사자, 사업단 가족 등이 함께하고 있다.
지난 27일 오후 안성시 공도읍 문기초등학교의 정문 입구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강종찬 화가와 사업단의 어르신들, 그리고 따라나온 가족과 봉사자 등 10여 명이 연신 붓을 놀리고 있었다.
그들의 붓끝을 따라 벽에서 금세 사자탈이 춤추고 엿장수가 신명나게 노래하며 꼭두쇠가 힘차게 상모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마추어치곤 꽤 수준 높은 이 결과물을 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제대로 그림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어르신들은 벽화 사업 현장에 나서기 전 강종찬 지도강사로부터 20여 회에 걸쳐 70시간 이상의 이론 및 실기 교육을 받았다. 커리큘럼은 수채화, 산수화, 벽화 그리기 이론을 시작으로 야외 스케치와 미술관 견학, 명화 감상, 드로잉과 채색 등 실기수업까지 체계적으로 짜여져 있다.
회원 중 일부는 3년전 실버벽화사업단이 운영되는 첫해부터 활동, 지속적인 교육과 현장활동으로 실력을 쌓고 있다. 회원 한 명 한 명이 장기적으로 이 사업이 유지 운영될 수 있는 기틀이 되는 셈이다.
이에 대해 이인숙씨(68ㆍ여)는 “미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뒤늦게 실버벽화사업단을 통해 난생 처음 미술대학에서 배우는 것처럼 수업을 들으며 자부심과 기쁨을 느꼈다”며 “특히 노년에 색을 칠하고 마르기를 기다리는 미학을 생활하하고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여가활동보다 좋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강종찬 지도강사는 “어르신들만으로 구성된 벽화사업단은 체력적 한계가 있는 만큼 젊은 사람부터 시민 누구나 강의를 들은 후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발전 방안을 제안했다.
▲마을 이야기가 있는 벽화로 차별화 꾀해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의 주인공은 안성으로 향한다. 안성은 경기도와 충청도가 만나며 삼남의 입구다. 글공부에 빠져 가정경제에 소홀했던 허생은 이곳에서 장사꾼으로서의 기질을 발휘한다. 나라 제사에 쓰일 과일 등 필수 상품을 두 배 가격에 모두 사들인 후, 더 높은 가격에 되판다.
갑자기 왠 허생 타령인가. 허생의 매점매석에 대한 찬반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안성문화원의 실버벽화사업단이 지역 곳곳에 벽화를 그리면서 동네 이야기를 주소재로 끌어들여왔음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무능력한 허생이 뛰어난 상인으로 재탄생하는 무대가 바로 안성이다.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조선말까지 안성장터는 전국 3대장으로 꼽힐만큼 규모가 컸던 시장이다.
안성문화원은 이같은 동네 이야기를 주목했다.
실버벽화사업단을 꾸리면서 일관된 주제 없이 사진 찍기 좋은 예쁜 그림으로 벽을 채우는 여타 마을과 달리, 안성의 전통을 벽화의 주소재로 활용키로 계획한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허생전에 등장하는 안성장터이며 조선 후기에 하나밖에 없던 여자 꼭두쇠로 안성남사당패를 이끌었던 바우덕이가 그것이다.
양장평 원장은 “지역의 노인이 벽화 제작 능력을 키우는 동시에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이를 재현하면서 지역문화가 널리 뻗어나갈 수 있는 데 한 몫 한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흔히 잘못된 광고로 제품은 기억나지 않고 인상적인 모델이나 이미지만 각인되는 것을 꼽는다.
벽화사업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당연히 차별화된 ‘스토리’가 존재해야만 한다. 안성문화원이 실버벽화사업단을 운영하면서 도긴 개긴 벽화를 지양하고 지역성을 끄집어낸 점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이유다.
류설아기자 rsa11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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