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이웃의 아픔을 나누어 보자

최근 한 TV방송국은 사회 최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사립고등학교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방영 중이다. 설정 자체가 암시하듯, 이 드라마는 현대자본주의가 가능하게 만든 ‘부과 권력의 대물림에 기초한 신(新)신분제’를 극화(劇化)하고 있다.

비록 이런 학교가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존재하기란 쉽지 않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것을 증명한 예가 바로 최근 우리나라 최상류층 자제들의 ‘국제학교 부정입학’ 사건들이다. 그래도, 우리사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한, 이러한 ‘귀족학교’의 존재는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하며 어느 정도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정반대 편에 있는 (사회적으로) ‘버려진 아이들’의 존재는 결코 간과할 수가 없다.

아픔딛고 일서는 새 가정들에 격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받은 상처들은 고스란히 우리사회 전체의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버려진 아이들’이 참고 견뎌내야 하는 모진 시련들, 특히 그들의 비인도적, 비윤리적, 반인권적인 성장환경은 우리사회의 위선과 부정을 드러내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최근 발생한 울주 8세여아 폭행치사사건과 서울 8세 남아 폭행치사사건 등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두 사건들은 공통적으로 이혼의 아픔, 새 가정에 대한 어린 자녀의 부적응, 의붓어머니의 히스테리와 잔인한 폭행, 친아버지의 무관심이라는 비극적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OECD 국가들 중 최고의 이혼률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돌싱’들의 재결합을 위한 TV 미팅 프로그램이 상당한 인기를 끌만큼, 가정들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 공개적인 사회현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공연한 사회현상일지라도, 가정의 와해와 재구성은 가족구성원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문제가 결코 아니다. 특히 관계된 자녀들이 미성년일 경우, 그들이 받는 고통과 충격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새 가정 구성을 위해서는 부모의 (재)교육과 자녀를 위한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새 가정들의 부담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사회적 지원은 매우 미미한 상태이다. 특히 전문가들의 도움을 스스로 찾을 확률이 낮은 사회계층의 경우, 국가나 공공 전문기관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이 매우 절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사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좀더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고민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소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의붓 부모들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의 편견이다. 특히 의붓어머니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고착화되어 있다. 그래서 동서양의 전래동화들에 등장하는 의붓어머니들은 십중팔구 ‘악의 화신(化身)’들이다. 물론 의붓 부모들 중에는 사악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친부모들 중에도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함께 울고 웃을 어깨와 가슴이 필요

반면 의붓 부모들 중에는 양(養)자녀들에게 친부모들보다 더 눈물겨운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붓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붓 부모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좀처럼 깨지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많은 새 가정들이 불필요한 심리적 부담과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특히 앞서 언급한 종류의 사건들이 터질 때 마다, 의붓 부모들이 짊어져야 할 심리적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지금 새 가정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현금이나 바우처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을 이웃, 그들이 기대어 울 어깨와 가슴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제 과거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려는 새 가정들에게 격려의 손길을 내밀어 보자. 그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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