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임동식의 ‘친구가 권유한 눈꽃구경’을 소개한 바 있다. 초겨울부터 눈이 많이 내린 탓도 있었지만, 눈 쌓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하고 싶었던 게다. 사실, 도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눈이 반갑지만은 않다. 사무실에서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볼 때는 회상에 젖다가도 막상 퇴근길로 나서면 바로 짜증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올해도 겨울 길목에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 12월도 깊숙이 들어가야 눈을 구경할 수 있었던 수년 전의 상황과 달리 11월부터 한파가 몰려왔고 눈이 내렸다. 나는 다시 임동식의 ‘눈 풍경’이 떠올랐다. 어김없이 작가는 지난해에 다 그리지 못한 미완성의 그림을 들고 눈꽃 풍경을 그리기 위해 길을 나섰을 터이다.
지난달에 시작되어서 12월 7일까지 개최되는 이번 개인전에도 작가는 ‘친구가 권유한’ 눈 풍경 작품 두 점을 출품했다. ‘친구가 권유한 눈 나리는 풍경’과 ‘친구가 권유한 향나무’가 그것인데, 그 중 향나무 풍경이 눈에 띄었다.
함박꽃이 거대한 폭포수의 물 이슬처럼 쏟아지고 있다. 세상이 온통 하얀 눈꽃 천지다. 하늘도 땅도 나무도 마른 풀잎들도 눈 더미로 덮였다. 화면 중앙에 서 있는 큰 향나무 한 그루. 넓게 자란 나뭇가지들의 두 팔 위로 층층이 눈밭을 일궜다. 작가는 이 순간을 기다려 눈 내리는 풍경 속 향나무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눈이 내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를 어쩐다?
지금 이 장면은 눈꽃 세상과 나무를 그리라고 권유했던 친구가 와서 화구를 정리하는 장면일 것이다. 작가도 더 이상 눈 풍경을 그릴 수 없었을 테고. 두 벗은 서둘러 이 풍경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작가는 왜 굳이 이 장면을 향나무 풍경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임동식이 그린 수많은 ‘친구가 권유한’ 그림들에는 그 친구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늘 친구가 권유한 풍경을 그렸을 뿐 그 자신도 화면 속에 등장시킨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 그 둘이 등장한다. 작품의 주제는 향나무이지만, 나는 이 그림의 실제 주제는 두 벗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늘 권유하고 권유받았던 상황의 ‘벗다움’을 보여준다.
거대한 향나무 품에서 두 사람은 풍경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향나무 아래에 있다. 푸른 향나무는 두 사람을 품어서 그림을 완성시킨다. 저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소소한 이야기가 있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향나무 아래에서 벌어졌던 그 짧은 순간의 눈사태와 그래서 당황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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