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광주 마재와 홍현주, 숙원옹주의 부마

경기도 광주 출신인 정약용(1762~1836)이 광주 마재에서 노년을 보낼 무렵에는 홍인모(1755~1812)의 아들 삼형제가 자주 그를 찾았다. 1830년 다산의 장남 정학연(1783~1859)보다 9세 연하인 부마 홍현주(1793~1865)가 다산을 방문했다.

이에 다산은 그 지역에 나는 농어를 잡아 대접하려 했으나 아쉽게도 한 마리밖에 잡지 못한 사실 등 이때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다산이 지은 시가 전한다.

한편 이와 관련된 그림으로 사료되는 화면 상단에 다산이 7언 제시가 있는 <물고기> 그림도 전한다. 개인소장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이 그림은 다산의 탄신 300주년을 맞은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 ‘다산 정약용-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보듬다’(2012.10.30~12.16)를 통해 일반에게 최초로 공개되었다.

홍현주는 문장으로 이름을 얻은 명문가의 자제로 12세 때 정조의 부마도위가 되어 영명위에 봉해졌다. 그의 배필은 다름 아닌 정조와 수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숙선옹주로, 순조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홍현주의 가계를 살피면 조부 홍낙성(1718~1798)은 이조·병조·형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친 홍인모는 우부승지를 역임했으며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으니 현주가 막내이다.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역임한 큰 형 홍석주(1774~1842)는 조선 제24대 왕 헌종의 사부였다. 가문이 너무 성하면 과하다 여긴 모친의 권유를 따라 작은 형 홍길주(1786~1841)는 출사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고 문장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이들 삼형제들이 서화에 대해 남다른 큰 관심을 알려주는 자료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단원유묵첩』이 있다. 이 서첩은 ‘조선의 그림신선’으로 지칭되는 김홍도(1745~1806 이후)가 타계하자 그의 외아들 김양기가 부친이 남긴 서간이며 타인의 시를 쓴 부친의 유묵을 모아 서첩을 엮은 것이다.

이 서첩 내에는 6쪽으로 된 명말 청초에 활동한 왕탁(1592~1652)의 글 등을 옮겨 쓴 것인데 그 말미에 김홍도 자신의 태어난 해가 1745년임을 밝히고 있다. 이 유물이 덕수궁미술관에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면서 비로소 조명되었다. 이 서첩에는 홍씨 3형제 글이 모두 실려 있으니 서문은 홍석주와 신위가, 뒷부분엔 홍길주와 홍현주 등 5인의 발문이 있다.

간송미술관에 1983년 봄에 개최한 기획전인 ‘추사묵연’을 통해 홍현주의 산수화 2폭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이어 2001년 봄 연 ‘추사와 그 학파’ 전시엔 ‘달밤의 맑은 정취(月夜淸興)’가 출품됐다. “오른쪽은 장취원도의 뜻을 따라 방한 것으로 묵화 삼수는 해거재 부마도위 홍현주가 그린 것이다.

원래 책상에 간직하고 싶었으나 초당 정미원이 간절히 원해 그에게 준다. 1829년 늦은 겨울”이란 제사가 화면 좌측에 있다. 2011년 봄에 동처에서 개최한 ‘사군자’ 전시에는 <묵난> 이 출품됐다. 아울러『다산시문집』6권 ‘송파수작’에는 ‘영명위의 화첩에 절구 네 수를 쓰다’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 기존의 다산 그림으로 알려진 산수 4점은 홍현주가 그린 것으로 재확인된다.

경기도박물관으로 옮겨와 홍현주 내외와 관련된 유물을 새롭게 접하게 되니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으며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수년 전 남양 홍씨 문중에서 홍현주·숙선옹주 묘를 이장하던 중 이들 부부의 묘지명과 목관 등이 확인되었다.

묘지명은 새로 옮긴 무덤에 다시 묻었고, 표면에 붉은 색을 칠한 뒤 놀랍게도 그 위에 금칠을 한 목관 중 옹주 관에선 당의와 원삼에 부착된 흉배 2점을 수습하게 되었다. 목관 상판과 상태가 좋지 않은 두 흉배는 경기도박물관에 옮겨져 보존처리를 거쳐 유물창고에 안착됐다. 차인이기도 한 홍현주 유작들은 내년 봄 경기도박물관에서 개최할 ‘차 문화 기획전’을 통해 경기도민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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