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노소동락, 50대 속의 김홍도

수원 출신 미술사학자 오주석(1956~2005)은 외우(畏友)로 평소 아끼고 존경한 후배이자 도반이며 절친이었다. 그는 50을 넘기지 못하고 타계해 내달 5일이면 벌써 9주기가 된다. 200자 원고지 1천매가 넘는 석사논문인 ‘이인문필 <강산무진도> 의 연구’는 두 학술지에 나뉘어 실렸고 사후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이와 함께 그가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로 자리매김한 ‘조선의 그림 신선(畵仙)’ 김홍도에 대한 저술은 한국회화사 연구에 큰 획을 그은 성과로 평가된다. 단원이 태어난 곳에 대해선 여전히 이견이 없지 않으나 그가 어린 시절 경기도 안산에서 일정기간 머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단원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기술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표암 탄신 300주년을 맞아 개최한 ‘표암 강세황시대를 앞서간 예술혼’(2013.6.25~8.25)을 통해 새로운 그림 한 폭이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미술부 권혜은 학예연구사에 의해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로 명명된 작품이다.

균와는 ‘대나무 움집’이나 ‘대나무가 있는 별장’의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모임에 참가한 여덟 사람 중 한 사람인 신광익(1746~?)의 호이며 모임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광익은 신을 벗고 안석에 기댄 채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단원보다 한 살 아래이며 이들보다 더 어린 인물이 꽃가꾸기에 미친 사람이자 꽃 그림으로 유명한 백화보를 그린 김덕형이다. 8명의 등장인물 중 50대가 셋, 10대가 3명이니 노소동락이 아닐 수 없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의 한 사람으로 남종문인화의 토착화에 기여한 풍채 좋은 57세의 심사정, 훗날 예원의 총수로 당대 최고의 감식안인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뾰족한 턱의 삼각형 얼굴로 벼슬길에 나가기 전인 51세 강세황, 취화사로 일화를 많이 남긴 치건을 쓰고 바둑을 두는 52세의 최북, 바둑을 관전하는 온화한 인상인 55세의 허필, 한 폭 그림에 김홍도 등 조선왕조의 ‘우리 문화의 황금기인 진경시대’인 18세기 내로라 하는 화가들이 여럿이 등장한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남긴 허필의 발문에 의해 합작품임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그들의 화풍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강세황이 구도를 잡았고 인물은 김홍도가, 소나무와 바위는 심사정이 그렸으며 채색은 최북이 담당하는 등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 그림은 일본에 유출된 것이었으나 마치 전시회를 앞두고 이를 위해 고향을 찾은 양 귀환한 것이다. 제발의 간기로 1763년임을 알 수 있으니 특히 이 그림 속엔 퉁소를 부는 만 18세 김홍도는 앳된 모습의 준수한 청년이다.

김홍도는 문인화가 윤두서와 강세황처럼 자화상을 남기지는 않았다. 이 점은 ‘조선의 그림 성인(畵聖)’ 정선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때 알려진 수장가로 서화에 이름을 얻은 송은 이병직 소장이었던 <초상> 은 현재 북녘에 있으나 단원의 <자화상> 인 양 소개되기도 했다.

단원에 대한 서술을 문헌에서 살피면 스승 표암은 ‘눈매가 맑고 용모가 빼어나 익힌 음식을 먹는 세속인 같지 않고 신선 같은 기운을 지님’을, 역관의 아들로 여항문인인 홍신유(1722~?)는 ‘그 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 세속인이 아님’을, 단원의 외아들 김양기의 친구이며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조희룡(1789~1866)은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신선과 같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싱클레어 안의 데미안처럼, 죽었으되 기억해 주는 이 있으면 그는 살아있는 것이니, 나를 기억해 주는 이 누구인가. 누구의 기억 속에 깃들까.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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