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5주년 PHOTO경기가 걸어온 길] 25살, 청년정신 ‘PHOTO경기’

1989~2014, 변화와 혁신의 ‘사반세기’

경기일보 자매지 ‘포토경기’가 2월 1일자로 창간 25돌을 맞았다. 지난 1989년 창간 이래 경기도내 각종 이슈와 소박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발굴, 독자들에게 알짜 정보를 제공해 온 포토경기는 경인지역 최고의 고품격 로컬잡지로 자리매김했다.

그동안 포토경기는 알찬 잡지로 거듭나기 위해 경기도·인천지역 이야기, 사람, 역사, 정보 등을 싣는 지면을 늘리고 독자들이 알찬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지면을 재구성 하는 한편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최신 비주얼 편집기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지난 1989년 첫 창간호를 세상에 선보인 포토경기는 지금까지 지령 300호(25주년)를 발행해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했다.

포토경기는 ‘디지털’과 ‘인터넷’이라는 막강한 경쟁 앞에서도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포토경기 25년 발자취는 경기도, 인천지역 지방언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에 포토경기 25년 역사를 되짚어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봤다.

1989년 3월 창간   경기·인천지역 언론사 최장수 월간지

들불처럼 타오르던 민주화의 열망이 권위주의를 소각했던 1989년 3월. 경기일보는 지역 일간지로는 최초로 월간지 ‘포토경기’를 발행했다. 이후 25년, 지령 300호가 나오는 동안 한 차례 결호 없이 지역 최장수 월간지로서의 명성과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창간호에는 윤석한 경기일보 초대 발행인과 임사빈 경기도지사가 ‘함께 키우며 함께 보람을’, ‘도민들의 자긍심 고양에 큰 기대’라는 주제로 각각 창간사와 축사를 전했다.

창간사에는 윤 발행인은 “‘민주언론 구현’, ‘신뢰사회 구현’, ‘건전의식 함양’, ‘지방문화 창달’이라는 경기일보의 사시를 살려 포토경기에는 시각적인 언론매체로서 경기인들의 애향심과 긍지 그리고 우정을 담아 보일 것”이라며 “오늘 탄생한 포토경기의 꿈과 희망이 싱그럽게 뻗어나가며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고 보람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기 바란다”고 축사했다.

창간호의 분위기를 살려 첫 호에는 유명인을 표지모델로 삼았다. 영화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영화배우 강수연. 그해 2월 2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받은 23살 앳된 강수연의 모습을 담았다. 붉은 드레스가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창간 인물에는 故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선정됐다. 정 회장은 남북이 공동으로 금강산 지구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원대한 계획 아래 1989년 1월 23일, 민간인 신분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 지면에는 방문 당시 관련 일화와 사진을 실었다.

월간지라고 해서 지역 콘텐츠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컬러면의 장점을 살려 흑백이 주류였던 일간지보다 훨씬 실감나게 현장과 인물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었다. 악취로 몸살을 앓고 있던 수원 화홍문을 찍은 ‘카메라 고발’ 섹션과 민족수난의 참상지였던 ‘제암리 교회’, 민주화에 몸 받쳤던 ‘故함석헌 신부’의 이야기와 추모식 풍경을 생생하게 담았다.

연재물로는 ‘달라지는 우리 마을’ 기획이 시작됐다. 첫 회에는 ‘시흥’, ‘오산’, ‘군포’, ‘하남’, ‘미금(지금의 남양주)’ 6개 지역의 목소리를 담았다. 지역의 인구와 면적, 연혁, 도시기반시설, 발전계획 등을 초대시장과 관련 공무원 인터뷰와 함께 깊이 있게 다뤘다.

이 기획은 ‘고장소식’, ‘지역소식’ 등의 명칭 변화를 거쳐 ‘포토뉴스’와 ‘탐방’ 등의 지역 정보와 뉴스를 전달하는 섹션으로 분할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 신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역정보와 사진, 스포츠, 연예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옮기며 독자들의 알권리 증진은 물론 볼거리 확대에 주력했다. 당시 판매가격은 1천원. 1989년 짜장면 한 그릇 가격 1천300원보다 300원 저렴했다.

1990년대∼중반   지역소식 전달하는 ‘이야기꾼’ 역할 ‘톡톡’

환희와 한계를 안고 시작한 1990년대. 지방자치시대의 도래와 함께 포토경기도 콘텐츠 다양화와 차별화, 심층성 확보에 주력했다. 시선을 낮춰 유력인사가 아닌 지역민의 소소한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그 달 포토경기의 얼굴인 ‘이달의 인물’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의 모습을 실었다.

13호(1990년 1월)에는 19년 동안 ‘수원 우체국’ 소속 집배원으로 일한 이갑동씨(당시 55세)의 정년퇴임 이야기를 다뤘다. 이외 5년 전 폐암으로 남편을 잃고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며, 중풍 걸린 시어머니는 물론 중풍 걸린 이웃할머니까지 돌보고 있는 박종분씨(당시 52)의 따뜻한 이야기를 ‘이달의 인물(18호)’에서 다루기도 했다.

일회성 기획으로 단발 게재되는 기사를 대체해 ‘①, ②, ③ …’ 형식으로 번호를 부여하며 체계성을 갖춘 연재물도 속속 등장했다. 경기지역 문화재를 찾아다니며 그에 얽힌 유래와 이야기를 소개하는 ‘경기문화재를 찾아서’, 지역 예술인의 작품을 소개하는 ‘경기사진작가 초대전’도 1990년대 상반기 연재되기 시작돼 1995년 2월(72호)까지 각각 60여 차례 소개됐다.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시도도 있었다. 바로 ‘전국누드촬영대회’, ‘지상사진전/누드’ 섹션이 그것. 5호(1989년 8월)에 사진작가 이희규씨의 누드사진 작품이 실험 게재됐던 것이 독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에 따라 1994년 1월부터 2010년까지 무려 16년간 해당 행사의 내용과 작품을 비정기적으로 40여 회에 걸쳐 실었다. 당시 독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 섹션이 실리는 그 달에는 항상 이 페이지만 찢겨 있을 정도로 품귀현상을 빚었다고 한다.

품질의 변화도 있었다. 90년대 총천연색 시대의 정착과 함께 4분의 1가량(20∼24면) 흑백이던 것이 13호부터 전면 컬러판으로 교체됐다. 이에 따라 판매가격도 기존 1천원에서 3천원, 다시 1995년 5천원으로 인상됐다.

지역 예술인을 집중 조명하는 포토경기 최장기 연재물도 게재를 시작했다. 구체적 대상 없이 인물이나 작품을 조명했던 ‘포토경기 갤러리’가 1993년 12월호(58호)을 끝으로 ‘전통의 맥’으로 바뀐 뒤 2008년 12월호 서양화가 김학두씨를 끝으로 거쳐 간 예술인만 120여 명에 달한다.

경기일보 지면과 함께 매월 연재됐던 기획시리즈로 알려지지 않은 지역문화 예술인을 널리 알리고 지역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 중반∼2000년대   대대적 변화를 위한 ‘태동’

1995년 11월은 포토경기에 있어 기념비적인 달이다. 창간이후 7년 가까이 고수해왔던 국배판에서 지금의 4x6배판으로 판형이 축소됐다. 다소 촌스러웠던 상호 디자인도 수정됐다. 빨간색 배경에 흰색글씨로 ‘PHOTO 京畿’라고 기입된 상호가 배경을 투명처리하고 깔끔하게 처리했다.

글만 나열하는 방식의 목차를 곳곳에 사진과 함께 배치 독자들이 쉽고 빠르게 기사를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한 점도 눈에 띄는 변화다.

또 지역 기사와 콘텐츠를 강화했다. 지역 외적인 요소를 줄이고 지역 내 ‘기업 탐방’, ‘가볼만한 곳’, 도정과 시정 소식과 생활정보를 담은 ‘배워봅시다’ 등 지역 독자에게 유익하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는 콘텐츠가 확대됐다. 당시 인쇄가격과 종이가격 등 원자재 값 상승과 맞물려 1996년 이후부터 판매가격이 1천원 올라 6천원으로 올랐다.

이 시기부터 2000년 중반까지는 표지 디자인이 매달 다를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새로운 표지디자인을 정하기 위한 시도였다. 색상이나 배치, 한글과 한자, 영어를 혼용하는 등 포토경기만의 고유상호를 찾고자 노력했다.

현재와 비슷한 상호 디자인이 시작된 것은 2000년 11월로 색상 혼합 없이 한 가지 색상으로 한글과 영어로만 포토경기 상호를 표현하며 심플함을 강조하는데 주력했다. 

월드컵의 물결로 기대감과 환희에 가득 찼던 2000년대 초에는 기획과 기사들이 포토경기의 주요 콘텐츠로 실렸다. 2002년 1월호(155호)에는 경기도새마을회와 도민 3천851명을 대상으로 ‘내 주변 쓰레기는 내가 줍는다’, ‘내가 먼저 인사한다’, ‘무단 주·정차를 않는다’ 등 ‘국민이 뽑은 10대 과제 실천 운동’을 선정해 캠페인 활동을 전개한 내용을 실었다.

여기에 시민의 힘으로 성공 월드컵 유치를 위해 수원구장 ‘1인1의자 갖기’ 운동, 축구장 내·외 열광팬 훌리건 예방 활동 등 지역 내 ‘2002년 한일월드컵’ 분위기를 고조할 수 있도록 다양한 내용을 지면에 배정했다.

2002년 6월(160호)에는 수원 월드컵 구장에서 촬영한 ‘붉은악마’들의 ‘코리아 파이팅!’ 사진을 실으며 월드컵 개막과 한국이 48년 만에 월드컵 첫 승과 함께 4강에 들었다는 소식을 발 빠르게 실었다. 특히 신문에서는 지면 한계로 게재할 수 없는 다양한 월드컵 관련 사진 20여 점을 게재하는 등 특집 기획으로 축제의 분위기를 전했다.

2011년∼   포토경기의 ‘정체성’ 담은 ‘제2의 창간’

포토경기의 다양한 변화가 있었지만 ‘제2의 창간’이라고 할 수 있는 혁신의 해는 2011년이었다. 그해 3월 포토경기의 장점과 단점을 분석해 체계적인 콘텐츠 분석에 돌입했다. 그리고 5월부터 대대적인 변신을 꾀했다. 가장 큰 변화는 ‘정체성’ 확립이었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보다는 ‘어떤 잡지를 만들 것인가’에 주력했다.

그 첫 변화로 ‘사진’ 중심의 콘텐츠를 ‘사람’ 중심으로 무게 추를 옮겼다. 지역 사람들의 심층적인 이야기에 집중했다. 도내 오피니언 리더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해 ‘보는 잡지’에서 ‘읽히는 잡지’로 변신을 거듭했다. 이에 따라 ‘커버스토리’, ‘경기초대석’, ‘프리즘’, ‘通인터뷰’ 등 다양한 인터뷰 전문 섹션을 신설했다.

또 자치단체장에 국한하지 않고 지역 내외 인사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이슈가 되는 인물을 인터뷰해 가독률을 높였다.

지면과의 차별화를 위한 시도도 이뤄졌다. 한국 문단 최고의 작가 인터뷰 섹션인 ‘문학공장’이 현재까지 30회 게재됐으며, 이슈와 화제의 현장, 문화가 소식, 갤러리 소개 등 알찬 콘텐츠를 대폭 확충했다.

지역잡지가 가진 ‘지역성’을 살려 독자와 가까우면서 실생활에 유익한 기사와 현장감 넘치는 기획취재기사를 지면에 많이 할애했다. 또 정보통신시대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웹과의 실시간 연동 등을 위한 별도의 포토경기 웹페이지를 운영해 온라인 독자층 확보에도 주력했다.

인쇄매체를 통해 만나던 포토경기는 그간의 역사를 바탕으로 디지털 시대에도 지역 내 최장수 월간지로서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 오랜 명성은 더욱 공공해지고 있다.

이 같은 디자인과 콘텐츠의 혁신으로 포토경기는 명실상부 경기지역 최고의 고품격 월간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진부한 잡지는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잡지는 대중의 욕망으로부터 뒤처지는 순간 존립이 위태로운 까다로운 매체다.

한때 막대한 발행 부수를 자랑했던 잡지일지라도 순식간에 폐간의 운명이 찾아오고는 했다. 어려운 환경에도 포토경기는 25년을 버텨왔다.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를 응시했던 것이 주요함이었다.

지금껏 그랬듯 포토경기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독자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하고 또 다시 변화해갈 수 있도록 지역을 떠받치는 ‘튼튼한’ 언론매체로 더욱 정진해 나갈것이다.

글 _ 강현숙·박광수 기자 mom120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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