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그 역사를 찾아]10. 동학농민혁명과 화성 제암리

동학사상으로 무장한 제암리ㆍ고주리의 3.1운동… ‘참혹한 희생’ 치러

제암리와 고주리의 비극

115년전 4월 15일 화성의 제암리와 고주리에서는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희생당했다.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던 3.1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곳이 화성지역이었다. 이에 일제는 간악한 복수극을 벌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참혹하게 희생당한 곳이 제암리와 고주리였다.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有田)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는 1919년 4월 4일부터 수원 화성지역의 3.1운동 참여자를 색출해 처단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동했다. 4월 14일까지 이 일대에서 잔혹한 진압을 하던 일본군이 화성 제암리에 도착한 것은 4월 15일 오후 2시 반경이었다. 아리다 중위는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한 후 한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 ‘할 말이 있으므로 교회로 전원 다 모이라’고 시달하였다.

마을에는 초가집 형태의 제암리 교회가 하나 있었다. 교회 입구에서는 일본군이 한명이 총을 세워 놓고 키가 총보다 큰 사람들을 교회로 들여보냈다. 이어서 교회문을 닫고는 곧바로 석유를 뿌린 후 방화를 하였다. 갑자기 아비규환의 상태가 된 교회 안은 인간 도살장이었다. 불길을 피해 나오는 자는 일본군이 쏜 총에 죽었다. 이날 교회에서 참살당한 주민들은 대부분 천도교와 기독교인으로 일반적으로 23명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37명으로까지 확인되는 등 아직도 제대로 된 규명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한편 제암리 교회의 참혹한 살상을 한 일본군은 남은 마을의 가옥들을 불태운 뒤 이웃한 고주리로 이동했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 밖에 안 되는 가까운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백낙렬과 함께 화성지역의 3.1운동을 지휘한 김흥렬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흥렬은 동학의 3대 교주이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의암 손병희의 절친한 동료로 화성지역 천도교 최고의 지도자였다.

발안 장날의 3.1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김흥렬의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군은 김흥렬을 비롯 집안에 있던 김흥렬의 동생 김성렬ㆍ김세열과 조카들인 김주업ㆍ김주남ㆍ김흥복 등 일가족 6명을 포박하고 집 뒤의 언덕으로 끌고 갔다. 순사보인 조희창이 김흥렬에게 백낙렬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김흥렬이 대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의 주구가 된 조희창을 꾸짖고 얼굴에 침을 뱉자 흥분한 조희창이 칼로 김흥렬을 찌르고 곧이어 일본군들에 의해 나머지 5가족을 칼로 난자했다. 그래도 분을 ?이지 못했는지 일본군들은 김흥렬 가족을 짚단과 나무로 덮어놓고 석유를 뿌린 후 생화장을 했다.

당시 희생된 김주업은 결혼한 지 겨우 3일된 새신랑이었고 충격을 받은 부인 한씨는 참상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통정대부의 벼슬을 했던 87세의 김흥렬의 부친도 사랑방에서 병환 중에 소식을 듣고는 한달간 식음을 전폐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고주리에서 희생된 분은 이렇게 해서 모두 8명이나 되었다.

동학혁명의 뒤를 이은 화성지역의 3.1운동

3.1운동 중 전국에서 가장 큰 저항과 항쟁을 보여 준 곳이 화성이다. 수원 화성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창도된 직후부터였지만 본격적인 전래는 1880년대부터였다. 이 시기는 국내외의 정세가 급박하게 전개되었던 때로, 내적으로는 동학의 중심지가 영남지역을 벗어나 강원도 영서지역과 경기도지역으로 옮겨졌으며, 특히 1880년과 1881년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간행될 정도로 교단의 조직이 안정되었다.

이미 수만의 교도를 거느리게 된 수원, 화성지역의 동학은 1892년부터 동학의 창도자인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교조신원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1893년 3월 10일 이른바 보은취회로 유명한 충북 보은군 장내리에서 척왜양창의 운동을 전개하자 신용구와 이민도의 주선으로 대략 4천명이 참가할 정도였다.

수원 화성지역의 동학도들은 1894년 동학혁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수원 화성지역의 동학은 1894년 9월 18일 동학의 교조인 해월 최시형의 총동원령에 따라 즉각 기포하여, 기호대접주 안승관과 기호대접사 김정현 등이 지휘한 수원지역의 동학조직은 5천여 명에 이르는 막강한 병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수원부를 점령할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었다.

동학혁명의 실패 이후에도 화성지역의 동학교세는 날로 번성해 수촌리의 백낙렬은 삼괴지역(우정면과 장안면), 김성렬은 팔탄면 고주리, 이병기는 팔탄면 노하리 등에서 동학과 천도교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고주리에서 참살된 김흥렬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1910년에는 수촌리를 비롯하여 독정리ㆍ어은리ㆍ장안리ㆍ화산리ㆍ이화리ㆍ덕목리ㆍ고주리ㆍ매향리 등 8개의 전교실을 설치할 정도로 교세가 회복되었다. 특히 남양교구는 1909년 8월 전국에서 성미(매 끼니마다 한 숟가락을 덜어서 모아 천도교 중앙총부에 납부하는 쌀)납부 성적 1등에, 수원교구는 2등에 선정될 정도로 동학의 세력이 막강한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수원 화성의 3ㆍ1운동은 서울보다 보름정도 늦은 3월 중순부터 격렬하게 전개되어 4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3월 16일 수원면 서장대와 연무대의 만세시위를 필두로 3월 21일의 동탄면 구오산리의 만세시위, 3월 23일 수원면 서호의 만세시위, 3월 25일 수원면 청년학생 및 노동자의 만세시위, 3월 28일 만세시위와 29일 수원기생조합의 만세시위, 3월 25일 성호면 천도교인과 보통학교 졸업자의 만세시위, 3월 29일 성호면 오산 장날의 만세시위, 3월 26일의 송산면 만세시위, 3월 29일 송산면 사강리 장날의 만세시위, 동일 양감면의 횃불시위, 동일 태장면과 안용면의 만세시위, 3월 31일 향남면 팔탄면의 발안 장날 만세시위, 4월 3일 우정면 장안면의 만세시위 등 20여 차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최대 규모로 전개되었던 장안면에서는 2천여 명의 시위 참석자들이 화수리 주재소로 향해 행진했는데, 주재소에 있던 일본인 순사 가와비다(川端豊太郞)가 밖으로 나와 군중들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시위자 중에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가와비다 순사를 처단하고 주재소를 불태워버렸다. 3.1운동 당시 죽은 일본 경찰 2명 중 한명의 죽음은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다.

수원 화성지역의 3ㆍ1운동의 특성은 수원 중심부 보다는 외곽지역에서 더욱 격렬하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는 수원교구의 집행부들이 체포된 의암 손병희의 구출계획을 짜는 등 매우 구체적인 만세운동을 준비한다는 것이 사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측의 소방대 등은 수원교구를 난입하여 교인을 마구 구타하여 지도급 인사들이 이미 사전에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수원지역 천도교인의 3ㆍ1운동은 수원의 외곽인 남양지역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제암, 고주리를 3.1운동의 도량으로

화성지역의 3.1운동은 3.1운동으로 3년형 이상의 형을 받은 자가 30명 이상이었다. 전국적으로 보아도 3년형 이상의 형을 받은 자는 천안 아우네 장터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등 소수인데 비하면 이 지역의 시위가 얼마나 거칠고 거셌는지를 알 수 있다. 시위대의 규모에 있어서도 전국적으로 200명 이상의 시위가 벌어진 곳이 많지 않은데 비해 이곳에선 대규모의 시위가 수차례에 걸쳐서 발생했고 또한 폭력을 수반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곳에서의 시위는 매일 장날을 따라다니면서 시위가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일제의 진압방식도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즉, 경찰과 헌병대만이 아닌 실제 전투병이 시위진압에 투입된 것이다.

이렇게 화성지역의 3.1운동이 타지역과의 차별성을 가지는 것은 이 지역이 이미 오래전부터 동학이 전파되었고 동학혁명 이후에도 오히려 교세가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이 지역 사람들은 동학의 인내천사상에 입각한 만민평등의식과 척양척왜의 동학혁명의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으로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희생되신 주민 분들은 모두 45명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전국적으로 3.1운동 관련해 이렇게 확실하게 희생자의 현장이 남아 있는 곳도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런 현장을 오늘 우리는 별로 살리지는 못하고 있다. 제암리 교회터에 있는 자그마한 기념관 하나만이 전부인 채 말이다. 고주리에는 그 흔한 비석하나 없다.

이 위대한 3.1운동의 이렇게 확실한 현장을 두고 화성시는 지금 현재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부디 3.1운동의 의의와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현장교육의 도량으로 사용함은 물론 국민들 모두의 애국심 고양의 장으로 혹은 청소년 수련의 장 등으로 살려지기를 바란다.

임형진(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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