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이 그들의 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웃을 수 없는 사회는 다름 아닌 ‘생지옥’이다. 그런데 필자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안산시는 이미 20여 일이나 그런 생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의 생떼같은 자녀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절망감이 이 지역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잠시 웃는 것만으로도 중죄인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오죽했으면 이곳 주민들의 집단우울증을 돌보기 위해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까지 가동되고 있겠는가? 이곳의 주민들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포함된 이 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위험요인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현재 정치권과 행정 및 치안 실무자들은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다. 재난 관련 법규와 매뉴얼을 재정비하고, 재난대책을 총괄할 기관도 신설하고, 위험요인이 있는 현장마다 실전 같은 재난대비훈련도 하고, 각종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관료와 기업인들을 색출해내기 위하여 대대적인 수사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것들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가 있을까? 과연 이 비극이 이 나라에 재난 관련 법규가 없고, 매뉴얼이 없고, 기관이 없고, 훈련이 없고, 현장에는 탐관오리와 악덕 기업주들만 넘쳐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히 ‘아니오’이다.
이 땅에 국가적인 재난이 멈추지 않는 것은 관련 법규와 매뉴얼은 있어도 지켜지지 않고, 해당 기관은 무책임하거나 무능하고, 각종 훈련은 형식적이고, 관청과 기업들은 권력자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기관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다.
현재 우리사회에 필요한 인물은 바로 ‘남의 자녀를 내 자녀처럼 아끼는 사람’이다. 얼마 전 박 대통령의 앞에서 한 여성은 오열하며 이렇게 외쳤다. “대통령 자식이잖아요. 저희 자식이고 내 새끼기도 하지만 대통령 자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 사회의 재난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도, 재난발생의 확률과 피해는 최소화시킬 수가 있다.
남의 자녀도 내 자식처럼 생각해야
생각해보라. 자기 자녀를 위해서라면 극심한 굶주림과 헐벗음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 모든 부모들의 기본정서가 아닌가?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먹는 음식에 일부러 불량재료를 넣거나 비위생적으로 조리하겠는가? 어느 부모가 길을 건너고 있는 자신의 자녀를 향하여 차를 난폭하게 몰겠는가?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탈 배에 그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화물을 과적하겠는가?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당장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데 자기만 살겠다며 현장을 뛰쳐나오겠는가? 만일 이번 세월호 속에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자녀들이 동승했었더라면, 아마도 이 사건의 결과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은 당시의 이기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의 이웃을 너희의 가축을 아끼는 만큼만이라도 아껴보라’는 취지의 비판을 하셨다(마태복음 12:11-12). 그렇다. 우리가 남의 자녀들을 자신의 애완동물을 아끼는 만큼이라도 아낀다면, 우리의 자녀들 모두가 함께 웃는 행복한 사회가 펼쳐질 것이다. 기억하라. 남의 자녀들이 웃어야 내 자녀도 웃는다.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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