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인간성을 지탱해 온 가치관의 침몰을 TV특보 생중계로 지켜보는 공포, 저 안에 사람이 분명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어떤 무지막지한 재난영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23일간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느낀 고통이 이런 유의 것이라 생각한다.
세월호 침몰사고는 연일 주요 언론의 톱뉴스로 다뤄지고 있다. 평형수가 무엇인지, 정조시간이 무엇인지 이제 온 국민이 안다.
그러나 세월호 탑승자가 총 몇 명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불과 이틀 전 생존자 수와 실종자 수가 7번째로 정정 집계됐다.
대한민국이 한 척의 거대한 세월호
대책본부는 이름과 책임자만 5차례 바뀌었다. 노란 리본을 달고 무사 생환만을 기도하던 시민들은 이제 ‘과연 국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한국 사회에 수십 년간 누적된 규제완화와 비정규직 확대, ‘관피아’로 압축되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안전이 중요하다며 안전행정부로 개명까지 한 정부의 재난대응시스템 부재, 실무자들의 도덕·안전 불감증까지. 모든 요소가 플롯이 돼 2014년 세월호라는 클리셰를 낳았다.
‘전원 구조’ 오보 속에서 언론도 청와대도 허둥댈 뿐이었다.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대책본부를 방문한 대통령의 질문은 천진했다. 배가 300여명의 승객을 태운 채 완전 침몰한 지 6시간이 지난 뒤였다. 스스로 배를 빠져나온 탈출자만 있을 뿐 구조자는 사실상 없다.
국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국민은 주권을 양도하고 국가는 국민을 보호한다는 사회계약론이 맹골수도의 거친 조류에 잠겼다. 국가가 국민을 외면하는 세상에서, 나와 내 가족이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전근대적 소망만 남았다.
가장 먼저 탈출한 선장을 대통령, 주인의식이 전무한 선원을 공무원과 정치인, ‘가만히 있으라’던 선내방송을 언론에 비유하며, 침몰하는 대한민국이 한 척의 거대한 세월호라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공식처럼 떠돈다. 나 역시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공범은 아니었나 하는 강박으로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
“정부의 초동대처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책임자는 엄벌하고 문제가 드러난 공직자들은 엄중 문책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선장인 박근혜 대통령은 이 비극을 제3자의 시각으로 평론할 뿐이다. 통치하고 군림하되 책임지지 않는다는 귀족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는 재난컨트롤타워가 아니다”는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발언은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비판이 거세지자 대통령은 ‘국가 개조 수준의 적폐일소(積弊一掃)’라는 대책을 들고 나왔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나올법한 폭력적 발상이다. 개조 수준으로 일소해야 할 적폐는 현 정부 그 자체이다.
전관예우, 봐주기 행정, 무분별한 규제완화, 기본 안전수칙 미준수. 바로잡을 것들이 너무나 많다. 새정치민주연합 세월호 침몰사고 대책회의에서는 심리치료 인력 지원뿐 아니라 공동체 붕괴 위험에 대한 장기 대책까지 중점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우리도 공범, 무한한 책임감 느껴
안전한 사회, 신뢰할 수 있는 국가. 회복을 위한 길은 다시 정치에 있다. 목소리를 키워 정부와 정치인이 진정 국민을 위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채찍질해야 한다. 나 역시 더 이상 부끄러운 어른이고 싶지 않다. 우리가 정치의 변화, 정책의 변화, 시대정신의 변화에 다시 매달려야 하는 이유이다.
유독 기념일이 많은 5월의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밥을 한술 뜨면서도, 우거진 나무를 바라보다가도 아이들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상흔처럼 떠오를 것이다.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수없이 오르내린 글귀를 되뇌어본다. 남은 실종자들이 하루속히 가족의 품에 안기기를 기도한다.
윤관석 국회의원(새정치민주연합ㆍ인천 남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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