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그 역사를 찾아] 18. 애국의 갈림길, 동학농민군 토벌의 선봉 맹영재

반봉건 외친 농민군 섬멸 앞장… 동족상잔 비극 불러

양평군은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해서 만든 행정구역이다. 짐작하겠지만, 양평(楊平)이란 이름은 양근(楊根)의 ‘양’자와 지평(砥平)의 ‘평’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양평군을 감싸고 흐르다가 한 몸이 되는 두물머리의 아름다운 풍경은 이 고장의 자랑거리이다.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던 화서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양평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양헌수 장군, 유배지 대마도에서 왜놈들이 주는 밥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 투쟁을 벌이다가 끝내 아사한 의병장 최익현, 의병운동에 전 생애를 바친 김평묵과 유중교, 13도창의군 도총재로 추대된 의암 유인석 같은 인물들이 모두 화서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또한 1945년 해방이 되자 전국에 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을 주도하여 자주 국가 수립을 위해 분투했던 몽양 여운형(呂運亨, 1886~1947)도 마땅히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그러나 양평군이 한말 의병전쟁의 발원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국 런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 의 극동 특파원으로 조선에 파견된 매켄지(F.A. Mckenzie)가 1907년 11월 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가 벌이던 양근을 답사하였다. 이때 양근 읍내를 지나 남한강변에서 의병 20명을 만난 매켄지는 이들의 허락을 얻어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흔히 보았던 의병들의 사진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모습이거나 옥고를 치른 감옥 앞이거나, 혹은 형장의 이슬로 처형되는 현장을 촬영한 것들이다. 그러나 매켄지가 찍은 사진 속의 의병들은 씩씩하고 늠름하다. 그날 전투를 지휘했던 의병장이 매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매켄지는 이 의병장이 자신에게 예의를 표시하면서, 무기 구입을 요청했으나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흥미로운 증언도 덧붙였다.

매켄지는 앞에서 살펴 본 일화를 포함한 《한국의 독립운동》을 미국에서 출판하여 일제와 맞서 싸우며 독립을 쟁취하려했던 한국인들의 열망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런데 이러한 양근 의병들의 출발은 갑오년 동학농민군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수도 서울을 품고 있어 ‘기전(畿甸)’이라고도 불리는 경기도에서도 동학은 깊고 넓게 뿌리를 내렸다. 양평은 경기도내에서 가장 많은 포를 가진 고을인데 양근에 3포, 지평에 2포가 있었다.

갑오년 9월, 해월 최시형이 총기포령을 내리자 양평의 동학농민군들도 삼정의 폐단을 혁파하고 보국안민을 위하여 떨쳐 일어섰다. 그러나 양평의 동학농민군은 강력한 장벽에 부닥쳤다. 지평현의 감역 맹영재(孟英在, ?~?)가 유림의 대표가 되어 김백선(金百先, ?~1896)이 이끄는 포수대와 함께 민보군을 결성했던 것이다. 맹영재는 맨 먼저 지평 출신으로 홍천에 접을 두고 활동하는 농민군을 공격했다.

《조선왕조실록》 1894년 9월 26일자에 실린 경기감사의 장계에 따르면, 맹영재가 민보군 100여 명을 이끌고 홍천에 있는 농민군을 공격하여 고석주 등 지도자를 사로잡고, 5명을 죽이자 남은 농민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든 양호(兩湖: 전라·충청) 순무영은 맹영재를 활약을 보고하면서 “비적(匪賊: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여 체포하는데 전심할 수 있도록” 소모관에 임명하고 수령으로 제수할 것을 건의했다. 이때 부상을 당했던 김백선은 치료비와 절충장군이라는 품계를 받았다. 9월 26일, 소모관에 임명된 맹영재는 사흘이 지난 29일에 지평 현감으로 부임했다.

10월 하순, 맹영재는 죽산 부사 이두황과 함께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잡아 죽였으며, 11월 초에도 홍천에서 커다란 전공을 거두었다. 장야촌에서 동학군 30여 명을 사살한 것을 비롯하여 서석면에서 농민군 수천여 명과 접전을 벌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농민군을 사살하고 포로로 잡았다. 맹영재가 이끄는 민보군은 경기도는 물론 인접한 강원도와 충청도의 농민군들의 발을 묶어놓았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손병희로 대표되는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반대편에는 순무선봉장 이규태, 장위영 영관 겸 죽산 부사 이두황, 소모관 겸 지평 현감 맹영재가 있다. 물론 이들과 함께 ‘동학군토벌대’로 조선에 파병된 후비보병 제19대대 제1중대(1개 중대 병력 221명) 대위 마스키(松木), 제2중대 대위 모리오(森尾), 제3중대 대위 이시쿠로(石黑)라는 일본군도 있다. 이처럼 동학농민군은 정예의 경군과 우수한 화력을 가진 일본군, 지역 사정을 훤히 알고 지리에 밝은 민보군과 빠른 발과 결속력으로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보부상들과도 싸워야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군에게 우수한 무기를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자 경복궁 점령 때 수비대로부터 몰수했던 모젤 소충 400정을 경군에게 되돌려 주었다. 우수한 소총으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이 토벌에 나서자 경기도의 동학농민군은 이들과 전투를 벌이기조차 어려웠다. 동학농민군을 나라에 맞선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민보군을 조직했던 양반 토호들은 관군과 일본군과 합세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여기에 보부상들까지 합세했다.

매천 황현은 동학농민전쟁의 처절한 역사를 《오하기문》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매천도 지배층의 입장에서 동학농민군을 바라보았다.

“이두황은 좌선봉장으로 안성에서 가운데 길을 택하고, 이규태는 우선봉장으로 우측 길을 택하였고, 지평 현감 맹영재는 좌측 길을 택하여 모두 충청지방에 들어갔다. … (전)봉준은 효포산에서 관군에게 대항하였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부대는 비교적 훈련이 잘 되어있는 정예병이었고 또 궁지에 몰려 있었으므로 죽음을 각오한 채 총탄을 무릅쓰고 돌진하였다. …맹영재는 회덕에서 적을 추격하였지만 계속하여 패하였다. 영재가 거느린 부대는 대부분 지방에서 모집한 병사들로 구성되었고 무기는 적과 같았지만, 죽기를 각오한 적과는 사기에서 차이가 있었으므로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지만 동학농민군은 끝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었다. 매천은 그 까닭을 《오하기문》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적은 산을 거점으로 삼아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관군이 일본총으로 사격을 가하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방으로 도망쳤다. …대개 우리나라 총의 사정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일본총의 사정거리는 4~500보도 더 되었으며, 불이 총대 안에서 저절로 일어나 불을 붙이는 번거로움도 없었다.

따라서 비록 눈이나 비가 내린다고 하여도 계속 쏠 수 있었다. 적과 수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적의 총탄이 미치지 못할 것을 헤아린 다음 비로소 총을 쏘았으므로, 적은 빤히 쳐다보면서 감히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대패하였다.”

1905년,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이 나라를 팔았다는 소식을 들은 매천은 나라가 망하자 “글자를 아는 식자로서 사람노릇 하기 힘들다”는 절명시를 남긴 뒤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고 단발령을 강제로 시행하자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지평의 유림 대표였던 이춘영과 김백선 등이 현감 맹영재를 찾아가 함께 거병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맹영재는 이들의 요청을 모두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병하지 못하도록 협박했다.

김백선이 자신을 따르는 포수들을 이끌고 의병에 참여하려하자 돈으로 이들을 매수하여 분열시키려는 이간책을 쓰기도 했다.

이춘영은 맹영재가 휘하에 있던 포수 400여 명을 영입하여 의병을 조직하고 전략·전술에 능한 김백선에게 선봉장을 맡겨 원주를 점령하고, 곧바로 제천을 공격했다.

이곳에서 김백선은 충주관찰사를 비롯하여 제천군수와 단양군수, 청풍군수 등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맹영재는 심복 이민옥을 비밀리에 의병 진영에 들여보내 방해공작을 펼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맹영재와 이민옥의 훼방으로 한 때 부대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동학농민군과 유림들이 선택했던 애국의 방법은 비록 충돌했지만, 자신이 처한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역사의 격랑 속으로 내몰릴 때를 만날 수 있다. 맹영재와 김백선의 삶은, 이러한 때를 만나면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어느 자리에 서야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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