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그 역사를 찾아] 19. 조국독립과 통일을 위해 몸 바친 몽양 여운형

사람을 한울림 섬기듯… 철저한 민족주의자요 탁월한 정치가

“몽양 여운형은 익(翼)의 좌우를 가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민족만을 사랑한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언론인 고 송건호)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고향은 남한강변에 자리한 경기도 양평군 신원리 묘곡이다. 신원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에서 남한강을 따라 약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다.

중앙선을 타고 양수역을 지나 신원역에 도착하니 정오였다. 역 앞에 몽양 여운형 생가·기념관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서 있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잠시 걸으니 굴다리가 나타났다. 굴다리에는 몽양이 아이들과 놀고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몽양을 보며, 집에 들어오면 언제나 아이를 등에 태우고 말처럼 방안을 기어 다녔다는 그의 인자한 모습이 떠올렸다.

굴다리를 지나 언덕을 조금 오르니 길옆으로 몽양의 어록이 새겨진 바위들이 나타났다. 몽양이 대단한 웅변가였다지만, 바위에 새겨진 어록은 여전히 울림이 깊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곳에 남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몽양은 어린 시절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했던 활달한 아이였다. 강가 모래밭에서 동무들과 연을 날리고 씨름을 하며 놀았다.

여운형은 숙명적으로 동학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인 1885년 2월에 여주에서, 3월에는 원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증조부 여장섭은 가족과 종을 이끌고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충북 단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단양은 정감록에 십승지지로 꼽혔던 피난지였는데 이곳에 동학도였던 종조부 여규덕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단양에 피난 가 있을 때 어머니 이씨는 여운형을 임신한 상태였다. 이씨가 시아버지에게 꿈에서 해를 보았다고 하자, 호를 ‘몽양(夢陽)’으로 지어주었다.

할아버지 여규신과 달리 아버지 여정현은 매우 보수적이고 권위의식이 강한 인물이었다. 반면 어머니 이씨는 엄격하지만 관용이 있는 여장부였다. 이씨는 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던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기르는 닭이 이웃집 닭과 싸워 져도 싸움 잘 하는 닭을 데려와 상대 닭을 제압시켜야 직성이 풀렸으며, 종이 얻어맞으면 힘센 하인을 보내 복수하게 하는 다혈질의 여성으로 별명이 “호랑이 마님”이었다. 어릴 적에 천리마라는 별명을 들었던 여운형은 책보다 놀기를 더 좋아했던 소년이었다. 힘이 세서 씨름을 잘 했고 활쏘기도 즐겼다고 한다.

여운형이 8살이 되던 1894년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하자 정부군을 토벌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패했다는 소식뿐이었다. 전쟁 소식을 들은 부친은 식구들을 이끌고 단양으로 피난했다. 그의 부친은 아예 단양에서 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모친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 보면 산촌에 묻혀 사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부부가 자주 타투다가 어느 날, 이씨가 인부를 사서 운형, 운홍 형제를 데리고 신원면 묘곡으로 되돌아 왔다. 결국 나머지 가족들도 1896년에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이씨의 영향도 많이 받았지만 여운형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아래는 《삼천리》 1933년 9월호에 실린 <여운형의 자서전> 라는 제목의 글이다.

“…나는 소년시대를 순전히 조부의 감화로 사상을 닦았다. 조부는 규신이라 하여 일종의 들에 있는 강개지사(慷慨之士)라 함이 적평이겠다. 그분의 사상은 ‘중국을 치자’함이다. 중국은 …우리 족속을 전통적으로 무시하여 왔다.

‘당당한 국가로서 이렇게 큰 모욕이 어디 있느냐’하여 몸소 중국 정토(征討)의 장문의 건의를 조정에 올릴 뿐더러 뜻을 같이하는 재야의 정객들과 서로 손을 맞잡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무슨 결사를 만들고 동분서주하고 계시었다.

그러다가 일이 아직 열매를 맺기 전에 그 비밀이 탄로되어 평안도 영원이란 산 높고 계곡 깊은 무인지처로 정배 갔던 터이다. 그래서 울며 자손들과 갈라져서 멀리 떠나신 조부는 그래도 생명만은 완전히 가지시고 몇 해 만에 돌아오셨다. …그렇지만 조부께서 오직 한 가지 변하지 않으신 것은 흰 눈 속에서도 오히려 푸른 장송녹죽(長松綠竹)과 같은 그 기개였다.

그 사상이었다. 그 지조였다. …조부께서는 흔히 맏손자 되는 나를 불러 세우고 중국과 조선의 근세사를 말씀하여 주시며, 또 북정의 경륜이 결코 그릇된 국책이 아니란 말씀을 늘 들려주셨다. …이리하여 나는 조부의 감화로 이 산골구석에 묻혀 있을 때가 아니란 자각을 얻고 앞서 말한 고향 양평을 떠난 것이 열아홉 살 때였다.”

이처럼 여운형의 할아버지 여규신은 중국 정벌을 평생 과업으로 삼았던 선비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같은 주장을 펼쳤던 사람 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무려 네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던 이필제(李弼濟,1825~1872)라는 인물이다. 조선 정부를 타도한 뒤에 군대를 이끌고 청국을 정벌하자고 주장했던 이필제는 1771년 해월 최시형과 함께 영해 관아를 점령하기도 했다.

여운형에게 동학도아지 북벌론자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청춘시대에 조부의 감화를 크게 받았던 까닭에 1912년 아우 운흥이 미국으로 갔지만, 나는 오직 곧장 중국 상해로 향하였던 것이다.”

여운형의 종조부 여규덕은 동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거론되는 인물이다.

“포덕 22년(1881) 신사 6월에 신사(최시형) 다시 개간소를 단양군 남면 천동 여규덕 집에 개설하시고, 조선문 가사 8편을 구송하여 간행케 하시니 이것이 곧 《용담유사》이었다.”(《천도교창건사》)

숙부 여승현은 동학농민군으로 참전했던 인물이다. 여운형은 숙부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의 숙부 되시는 여승현이 동학당에 들어 있었던 관계로 갑오의병란 때 커다란 재앙을 당했다. 조부이신 여규신은 숙부가 동학당에 입신하는데 대해 아무런 말이 없었으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맹렬히 반대하셨다.”

1908년 4월, 여운형은 부친상을 마친 뒤, 가문에서 고이 모셔온 신주를 깨끗이 불태우고,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렸다. 오랫동안 집안일을 돌봐주던 종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그대들을 다 해방하노라. 지금부터 각기 자유롭게 행동하라.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다. 그러므로 서방님이니 아씨니 하는 호칭부터 싹 없애라. 오직 인간은 낳을 때부터 평등이니, 주종의 예는 어제까지의 풍습이요, 오늘부터는 그런 구습을 탈피하고, 제각기 알맞은 직업을 찾아가라.”

그가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 집안 종을 해방시켰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양평은 물론 경기 일대로 퍼져나갔다. 양평은 화서 이항로의 고향이기도 하여 유교질서가 아주 견고한 지역이었다. “양반 축에도 끼지 못할 놈”이란 욕을 하고 상대하지 않거나 협박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여운형은 이런 비난에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꿈을 청년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숙부와 함께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지사가 학교를 세웠다. 양근 서시면 묘곡 사는 여승현, 여운형 제씨가 발기하여 해리에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여운형 씨가 명예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은 40여 명에 달했다. ( <대한매일신보> )

1910년 8월 29일, 조선이란 나라는 지상에서 사라졌다. 식민지 조국에서 범부로 살기에는 몽양 여운형의 피가 너무 뜨거웠다. 중국으로, 일본으로, 식민지 조국으로 뛰어다니며 독립을 역설했다.

1945년, 해방된 조선에서 몽양 여운형은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뛰어난 용모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탁월한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리처드 라우터백은 그의 저서 《한국 미 군정사》에서 “미군 상륙 후 1년간의 유력한 정치가는 우익 진영의 이승만·김구, 중간 우파의 김규식, 중간 좌파의 여운형, 좌익 진영의 박헌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레고리 헨더슨에 따르면, 미 국무성은 중도 좌파인 여운형을 중도 우파인 김규식과 합작시켜 민정 이양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고 하였다. 일제의 폭압 아래서도 살아났었던 그가 1947년 7월 19일, 동포의 흉탄을 맞고 운명하였다.

올해도 몽양이 서거한 날인 7월 19일에는 어김없이 서울 우이동에 있는 그의 묘소에서 추모식이 열린다. 특별히 하루 전인 7월 18일에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해방 전야-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과 국내외 독립운동> 이라는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이 열린다.(문의: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031) 772-2411)

몽양 여운형은 70년 이어진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조국을 이룩해야할 우리들에게 햇살과 같은 존재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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